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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KBS”의 얄팍한 역사의식

방송 80주년은 우리세대가 만끽할 일이 아니다

원용진 교수 | 기사입력 2007/03/23 [23:03]

“조선일보”- “KBS”의 얄팍한 역사의식

방송 80주년은 우리세대가 만끽할 일이 아니다

원용진 교수 | 입력 : 2007/03/23 [23:03]
<조선일보>는 3월 6일자 신문에 문석준, 홍익범 양씨의 수사기록을 찾았다고 사진과 함께 기사를 실었다. 양씨는 1942년 12월에 있었던 경성방송 단파 방송 수신으로 옥고를 치렀던 분들이다. 양씨는 모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혹은 출감직후 숨을 거두었다. 엄청난 고문 후유증이었던 듯 하다. 홍익범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는데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다시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을 나온 재원이었다고 한다.
 
홍익범은 당시 방송 작가로도 활동하던 송남헌씨, 경성방송의 방송부 소속 양세현 등을 통해 단파 방송을 통해 들었던 미국의 소리, 중경의 임시정부 방송의 뉴스를 다시 전해 듣고 이를 송진우, 김병로, 이인, 허헌 등에게 다시 알렸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가 정보를 챙기고  다시 언론사 사주, 주요 간부들 에게 전달하는 패턴이 그대로 작동했던

조선방송협회의 로고 © 플러스코리아
듯 하다. 어쨌든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성 최고의 특고(특수고등형사)였던 사이가 형사에 발각된다. (사이가 형사는 해방 후 경성에 잠깐 들렀다가 계동 현대 사옥 근처에서 피살당한다. 범인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성기석, 이이덕, 박용신, 김동화 등의 경성방송 기술부, 방송부 직원들과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을 전달했던 홍익범, 문석준 등도 투옥된다. 이른바 "JODK 단파방송 수신 사건"이다.

당시 투옥되었던 문석준이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다고 조선일보는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않은 사실도 보도했다. 문석준을 알고나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문석준은 일제 시기 <조선역사><조선역사연구> 등을 내놓은 사학자다. 그는 당시 드물게 찾을 수 있는 맑스주의 경제사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북한에서 한 때 대학교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홍익범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당시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전했다면 문석준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좌파진영에 주로 알렸다. 아직도 민족시인으로 활약 중인 이기형은 고향선배인 문석준을 통해서 여운형 선생을 만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여운형이 건준을 발족시키기 전에 전국조직을 지니고 있었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방범대 등을 은밀히 조직했던 것도 그런 연락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KBS1TV의 "특별기획 방송 80년 인물80년"방송화면     ©플러스코리아
<조선일보>는 문석준의 그런 사연들을 알면 그래도 문석준을 기리자고 할까.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 대해 아직도 반감을 지니고 있는 <조선일보>가 문석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조선일보 기자라는 사실을 살짝 흘려 지금 자신의 홍보 이익을 취하려 한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동아일보의 홍익범은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그랬던지 유난히도 이승만에 열광했던 것처럼 기록에 남아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방송을 통해 미국무성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등의 거짓 정보를 전하지만 홍익범은 이를 굳건히 믿었고, 그를 전달하는 데 분주했던 듯 하다. 이승만이 자신의 공로보다 더 알려진 것도 이 같은 방송, 그리고 그로부터의 소문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2년 8월부터 한국어 방송을 실시했다고 하니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각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몽양 여운형이 휘문고보에서 대중연설을 마친 후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곳은 현재 계동 현대사옥이 들어서 있다. 사옥 뒷편에 여운형이 거주하던 가옥이 지금은 안동칼국수집의 상호를 붙이고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방송을 통해 미국무성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등의 거짓 정보를 전하지만 홍익범은 이를 굳건히 믿었고, 그를 전달하는 데 분주했던 듯 하다. 이승만이 자신의 공로보다 더 알려진 것도 이 같은 방송, 그리고 그로부터의 소문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2년 8월부터 한국어 방송을 실시했다고 하니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각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몽양 여운형이 휘문고보에서 대중연설을 마친 후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곳은 현재 계동 현대사옥이 들어서 있다. 사옥 뒷편에 여운형이 거주하던 가옥이 지금은 안동칼국수집의 상호를 붙이고 있다.)
 

KBS는 지난 3월 1일 <단파방송 수신 사건>을 독립운동으로 규정한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뒤늦은 작업이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흔쾌하지는 않다. KBS는 1927년 2월에 경성방송 JODK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2007년을 방송 8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KBS가 그 후신이라는 주장과도 통한다. 실제로 그런 주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마치 서울대학병원이 대한의원이 자신의 전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JODK는 알다시피 일본의 사업자들이 돈이 될 수 있을까해서 시작을 했고, 정치를 펼치는 데도 큰 지장이 없겠다고 생각한 총독부와 배가 맞아 만들어진 방송이다. 호출부호가 일본 국내에만 제공되던 JO를 받은 데 대해서 일본이 조선지배를 더 강화하고자 일본 본국에서 모의한 증거로 내놓지만 실제는 그와 사정이 다른 듯 하다. 조선 내에서 먼저 일이 성사되었고, 일본 체신성에 총독부가 강력한 요청을 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맞아 보인다. 어쨌든 JODK가 KBS의 전신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좀 웃긴다. 그 웃기는 사실을 만회하기 위해 KBS는 당시 방송인들의 애국적 모습을 담으려 했던 듯 하다. KBS는 한국 대표 방송이고, 과거에도 그런 노력을 벌여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나 KBS의 속셈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JODK는 도대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친일 인사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후일 KBS에까지 관여했던 노창성은 대표적 친일인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이토 총독을 독대했던 주요 언론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JODK의 주요 간부자리에 앉는 이정섭은 조선임전보국단위원으로 활동했던 자다. 김안서로 알려진 시인 김억은 JODK에서 감청관 역할을 했고, 일제 미화의 글들을 남기고 이후 친일 문학자로 등재된다. 일찍이 창씨개명을 했던 이서구, 최남선의 사위이자 심훈의 친형이었던 심우섭 등도 친일인사로 이름을 올린 JODK 출신들이다. 대표적 친일 문학자였던 모윤숙이 경성방송에서 한 동안 몸담았다는 사실은 어떤가. KBS가 단파방송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당연히 이들의 이야기를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낯익은 사진 한장. 그 한 가운데 성기석이 있다. 성기석은 JODK 근무중 단파수신기를 직접 만들어 수신된 내용을 밖으로 알렸던 인물이다.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는다. 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한 이들의 감격에 벅찬 만세장면이다. 아래 위 하얀 옷을 입은 자가 성기석이다. 뒤로 무악재고개가 선명하다. 성기석은 중경에서 전해오던 조선임시정부 소식을 주로 들었던 듯 하다. 하지만 역사는 여전히 이승만이나 미국의 소리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기석과 함께 청취했던 이이덕, 김동화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홍익범은 많이 이야기할 수 있어도 여전히 문석준은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 쪽의 모습만을 보여주면서도 우리는 자신들의 현재를 축복하려 한다. 서울대학병원이 일본인들의 병원을 가리켜 자신들의 전신이라며 100주년 행사를 한다고 난리를 떨고, KBS가 방송 80주년을 말하려 한다. 좋은 것은 차지하고 귀찮은 것은 뒤로 넘기려 한다. 100주년, 80주년은 우리 세대가 만끽할 일은 아니다. 후세로 넘겨주자. 그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대신 우리는 후세들이 귀찮아 할 일들, 그런 부분들을 정리하고 청소해놓아야 하지 않겠나. 좌익이라 해서 역사에 숨긴다면, 나중 기억으로부터 더 멀어진 후세들에 일을 그 만큼 더 시키는 것 아닐까. 그러고도 우리는 일본더러 과거에 대해 사과하라 마라고 떳떳할 수 있을까.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은 1920년대-40년대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들이 걸었을 길들, 그들이 들러보았을 카페, 그들이 벌였던 청춘사업들, 피를 토하며 펼치던 격정적인 토론들, 매일 같이 밀려오는 근대의 물결들 그런 일들을 나는 매일 경험하는 듯 그 때의 인물로 사는 것 같다. 빙의에 빠진 것인가. 이제 이들의 이름을 더 이상 메모하지 않아도 그냥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름을 떠올리면 그들의 친우관계와 고향들도 떠올려진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구와 함께 하고, 누구의 사상을 따르고, 어떤 행동을 했으며 어떻게 광복을 맞이했을까.[원용진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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