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임종국카드’가 남긴 역사의 과업은?

국민의 힘으로 만드는 "친일파연구총서"로 영글어 가고 있다

김승은 | 기사입력 2007/04/19 [10:30]

‘임종국카드’가 남긴 역사의 과업은?

국민의 힘으로 만드는 "친일파연구총서"로 영글어 가고 있다

김승은 | 입력 : 2007/04/19 [10:30]
1만 3천여 장의 ‘임종국카드’가 남긴 역사의 과업 

 연구소 사무실에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기둥 위에 임종국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요산재에서 집필에 몰두하시던  1980년대 중반의 모습인데, 그 형형한 눈빛이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우리를 독려하는 듯한 인상적인 사진이다.  회원들도 많이 아는 이 사진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노력의 결실을 증언하고 있다.

 얼굴 뒤켠에는 책상 위 엉성한 나무 책장에 빽빽이 꽂혀있는 독서카드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임종국카드’로 선생이  평생을 바쳐 모아온 귀중한 자료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2년 전 발표한 글에서 “내 침략·배족사의 자료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할 뿐”(<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중에서)이라고 쓸 만큼 이 육필카드는 친일파 연구에 바친 선생의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임종국 선생     © 플러스코리아
친일문제연구와 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연구소의  소중한 자산으로 소개된 바 있는  이 카드들은 숫자만 헤아려도 무려 1만 3천여 장에 달한다.  1만 장에 달하는 인명카드는 가나다순으로 5, 60장 혹은 8, 90장씩 묶여 있었는데, 그 묶음이 125개나 된다.  그 외에 친일논설·작품의 작가, 일제말 (전쟁협력)단체, 각종  종교·경제·사회단체,  매일신보 기사색인 카드들이 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손수 자료를 베껴가며 모아오신 인명카드에는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가 시대순으로 소상하게 정리되어 있다. 『매일신보』나 『조선총독부 관보』, 재판기록,  심지어는 면사무소 인사발령기록까지  찾아볼 정도로 철저하게 자료를 모은 후 인물별로 꼼꼼히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 인명카드 여러 장 내지는 보관 파일 사진03, 04     © 플러스코리아
예를 들어 ‘문명기(文明琦)’ 인명카드를 들추어 보자. 모든 카드가 그렇듯이 문명기 이름이 한자로 적혀있고, 창씨명이 밝혀진 경우 창씨명 文明琦一郞을 적었다.  상단 왼쪽에 쓴 번호는 나중에 카드를  정리하는 이가 임의로 붙인 번호인데, 종이의 변색상태로  보아 번호 24-40·41이 나중에 작성된 카드로 보인다. 기록된 정보를 보아도 99-10·11번  카드에는  1930년대 후반 국방헌납 관련기사와 주요 경력이 간략하지만, 24-40·41번 카드에는 자세한  경력사항과 함께 각종 훈포상  이력, 국방헌납·전쟁협력행위 등이 날짜·출전(관보·매일신보)과  함께 기록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연호대로 明11, 昭7로 썼던 것을 1878년, 1932년으로 바꾸어 썼다.
 
▲ <(왼쪽)24-40.41 위아래 /(오른쪽)99-10.11 위아래 사진>     © 플러스코리아
24-40·41번 카드는 관보에 실린 관직임면사항과 신문의 각종 기사를 하나하나 찾아  기록한 것이다.  관보나 매일신보의 깨알 같은 글에서 한 줄의 인물정보를 찾아 기록한  끈기와 인내력은 카드기록의 양만으로 절대 가늠할 수 없다.  컴퓨터도 없이 눈으로  손으로 시간으로 기록한 한 장 한 장이 아닌가. 한편 99-10번 카드에는 금은광  매각대금 12만원 중 10만원을 애국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라든가, 애국기 100대 기부를  결의하고  일본 이세신궁(伊世神宮)에 참배한 후 돌아와  애국기헌납운동을 선도했던 사실, 취미가 한시(漢詩)라는 등의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1935년 발간된 『조선공로자명감』을 참고한 것이다.  30여 년 전에 먼지 쌓인  대학도서관 한구석에서 찾아낸 일제가 발행한 ‘친일공로자’들에 대한 칭송이나 매일신보에서 친일파 조선인들의 기록을 한자 한자 눌러쓰면서 느꼈을 선생의 고심참담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모아 기록한 ‘문명기’ 인명카드 정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명기(文明琦, 文明琦一郞, 1878.6 생)

[이력] 평남 평양 출생. 한학자 문승환의 장남. 어릴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덕 이주. 한학수학.

[주요경력] 제지업(1907)·수산업·광산업(1932) 경영, 경북 도평의원(민선1923·24·30/관선1927·33), 동해산업주식회사 감사(1923),  영덕전기주식회사 사장(사임 1930), 재단법인 광제회 설립·대표이사(1932), 포항소득조사위원(1934) 중추원 참의(1944) 역임

[전쟁협력]금은광을 12만원에 매각, 그중 10만원을 해군기·육군기 2대 건조비로 헌납(문명기호, 1935), 문명기 제창으로  조직된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에 1만원 헌납(1936.11), 북지파견황군 위문방문(1937), 광제회  통해 가미다나(神棚,  집안에 설치한 작은 신사[神社] 모양의 신단) 가가비치(家家備置)운동을 전개(1937), 지원병제도 실시 축하회 발기인(1938), 국방비 4만원 육군 헌납(1939), 황도선양회 회장(1941), 국민총력연맹 평의원, 임전보국단 평의원 및 경북지부 이사

[훈포상]대례기념장(1928), 시정25주년기념사배[賜杯](1935), 육군공사공로자로 감사장·은배·공로휘장(1938), 국방충실비 육군에 2만원, 학예장려금 해군에 4만원 헌납해서  감수포장[紺綬褒章:공익을 위해 사재를 기부한 사람에게 주는 감색 리본 기장](1939) 수여

[참고문헌] 매일신보, 조선총독부 관보, 조선공로자명감(398~399쪽)


문명기에 대한 주요 경력과 친일행적은 이 4장의 카드뿐이다. 그러나 이 인명카드를 기반으로 하나하나 자료들이  모이고 쌓여 드디어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시작되었다. 친일행적뿐만  아니라 논설과 작품을 써 전쟁협력을  독려한 인물들의  기사색인도 꼼꼼히 스크랩해 두셨기 때문에 연구소는 그 원고의 원본들을 충실히 찾아 모아두었고 아마도 <친일파연구총서>에 한 부분을 장식하지 않을까 싶다. 총 10권의 ‘친일파총서’를 평생 과업으로 삼았던 임종국 선생의 꿈은 이제 국민의 힘으로 만드는 <친일파연구총서>로 영글어 가고 있다.  늘 연구소  한켠에 친일인명사전편찬의 디딤돌이자 소중한 사료로 보관되어 있는 임종국 선생님의 친필카드는 오늘도 연구소 성원들에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엄중한 민족사의 과업을 일깨워주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자료팀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 보성녹차마라톤대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열정의 레이스 시작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