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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치 협력 미술가 숙청

최혜원 미술사학자 | 기사입력 2008/04/22 [19:20]

프랑스의 나치 협력 미술가 숙청

최혜원 미술사학자 | 입력 : 2008/04/22 [19:20]
아래 글은 미술사학자 최혜원 선생의 새 책 <미술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에 실린 것으로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미술가들에 대한 숙청문제를 다룬 내용이다. 친일 미술가들이 해방 후 한국 미술계의 주류를 점해 온 우리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 싣기를 허락해 주신 최혜원 선생께 감사드리며, 독자들의 일독을 권유한다. <편집자 주>

프랑스인들이 자국 내 역사 가운데 ‘괄호 속에 넣어버리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암울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때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하고 그들의 자존심인 파리를 내준 일이다. 프랑스 국토의 대부분을 독일 나치에 내어 주고 중부지역의  비시에 친독정권을 세웠다. ‘비시정부’로 불리는 이 독일의 협력체재인 이 정권은 페탱을 수반으로 한 파시스트 독재정권으로 독일에 예속되어 독일군이 점령하지 아니한 명목상의 자치지역인 비점령 지대를 다스렸으나 결국 나치 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무너졌다.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프랑스에는 그에 동조하는 약 37만 명의 파시스트들이 산재했었다고 한다. 이들은 선봉장으로서 독일의 프랑스 점령 하에 대독협력(부역)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협력 외에도 일부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 이데올로기적 협력, 기업가들의 경제적 협력,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개인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발 벗고 나섰다. 특히 미술 애호가였던 히틀러 때문인지 문화예술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프랑스의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이 독일군 총사령부의 선전정책에 협력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드랭, 블라맹크, 보나르, 마욜 등이 대표적인 미술가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치에 협력한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사상적인 찬동은 아니었어도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 문화예술가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반파시즘의 선봉장인 파블로 피카소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반 나치 활동을 벌여 나치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첫 번째로 올라가 있던 인물이었다.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계속해서 파리에 머무르면서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프랑스가 종전 후 곧바로 나치협력미술가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진행할 때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당시 전국미술가연맹 회장이었던 피카소는 반역자 숙청재판에 회부해야할 미술인 명단을 파리 경시청과 검찰에 전달했는데, 이 리스트에는 당시의 유명 미술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숙청작업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기간 중에 나치에 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 화가와 화상들을 모두 포함시켜 엄정히 진행되었다. 1946년 6월 미술가 23명을 ‘친나치부역미술가’로 낙인찍음으로써 프랑스의 과거사 문제는 마무리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신속하고도, 단호한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사회는 공감하였고, 반성과 용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는 프랑스에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최혜원 미술사학자 겸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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