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백제의 속국인 탐라국의 위치는 어디?

탐라국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제주도가 아닌 대만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16 [11:36]

백제의 속국인 탐라국의 위치는 어디?

탐라국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제주도가 아닌 대만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7/16 [11:36]
우리 국민 대부분은 탐라를 제주도의 옛 이름으로 알고 있으며, 탐라는 제주도의 대명사로 현재도 탐라=제주도의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제주도는 매년 10월에 개최하는 제주도민의 축제를 '탐라문화제'로 부르고 있다. 이렇듯 탐라가 과연 제주도가 맞는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 제주도민의 축제인  탐라문화제, 그런데 탐라가 과연 제주도일까? 아니라면 이름을 탐라문화제로 하면 안된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탐라국은 어디?  

먼저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하였는데 탁라(乇羅)가 네 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 2년에 탐라국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 20년에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지 아니한다 하여 왕이 친정하여 무진주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 기록되어 있고 “백제가 망하니, 신라 문무왕 원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좌평은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탐라=탐모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에서 탐라인에게 은솔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벼슬인 좌평을 가지고 있던 탐라국왕이 신라에게 항복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탐라국은 바로 백제의 속국(부용국)이었던 것이다. 

태종 3년(1403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상략) 의주(義州)는 의순(義順)으로 고치고, 안주(安州)는 안흥(安興)으로 고치고, 길주(吉州)는 길안(吉安)으로 고치고, 강릉(江陵)은 예전대로 하고, 제주(濟州)는 탐라(耽羅)로 고치어, 5대도호부(大都護府)를 삼으소서. 위의 다섯 부(府)는 모두 국경(國境)의 거진(巨鎭)이니, 마땅히 도호부로 칭하여 군민(軍民)의 책임을 겸하여 맡게 하소서.”라고 상소하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때는 제주라 불리던 것을 탐라로 고쳐 부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의 기록을 보면, “고려 숙종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서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고, 의종 때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다. 충경왕 11년 역적 김동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서 난을 일으켰는데, 4년이 지나 14년에 시중 김방경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충렬왕 3년에 원나라 조정에서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는데, 21년에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나라 승상이 상주하여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하는 성지를 받았고, 익년(翌年) 을미년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으며, 26년에 원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한 내구마(內廐馬)를 방목(放牧)하였는데, 31년에 도로 본국에 환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탐라라는 명칭은 제주의 옛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때의 기록을 보면 탐라라는 지명을 제주로 바꾸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 반대로 태종 3년부터 제주라는 행정구역을 탐라로 다시 바꿔 부르도록 한 것이다. 즉 현재의 제주도는 탁라(이전)-->탐라(1104년)-->제주(1295년)-->탐라(1403년)-->제주(?)로 지명이 변하게 된다.

왜 지명을 바꾼 지 100여년 만에 다시 탐라로 고친 것일까? 그 이유는 명나라로부터 강한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4년 명나라는 그동안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일본(大和州)에게 "일본"이라는 국호를 주면서 동이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의 역사까지 현재 일본에 주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탐모라국(대만)의 역사를 지워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왕조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지만 대의명분이 없자 강력한 외부의 힘을 끌어들인다. 그것이 바로 명나라를 대국으로 모시는 사대주의로 명의 속국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삼국연의라는 과대망상역사소설을 통하여 한족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었다. 이는 이민족에게 천하를 빼앗긴 것에 대한 정치적 보복과 흩어진 한족을 결집시키기 위함이었으리라.

즉 지금의 제주도는 1104년 이전엔 탐라(耽羅)가 아니고 탁라(乇羅)란 지명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탁라와 탐라는 서로 다른 지명으로 보인다. 만일 다른 지명이라면 삼국시대의 탐(모)라는 제주도가 아니란 말인가? 필자는 분명 서로 다른 지명으로 보며 삼국시대의 탐라는 제주도가 아닌 것으로 본다. 과연 그런지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하자. 


▲   탐라로 왜곡되어진 제주도를 위성으로 본 사진. 제주도는 동서로 길쭉한 섬이다.

<한단고기> <삼국사기> <일본서기>로 본 탐라국은 어디?  

  먼저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보면 단군왕검 경자 93년(B.C 2241년) “(상략)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 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耽浪)에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펴져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하 생략)”

여기서 탐랑(耽浪)이라는 지명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국계 너머로 멀리 아마 탐라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에 보면 “(상략) 기유년에 탐모라인(耽牟羅人)이 말 30필을 바쳐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탐모라(탐라)라는 지명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문무왕 2년(662년)에 보면,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움률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가 백제의 무덕(武德) 이래 이제까지 백제에 신속(臣屬)된 까닭으로 좌평의 관직을 쓰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백제 무덕(武德)이 어느 왕의 연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무덕은 무녕왕 ~ 위덕왕으로 볼 수 있으며, 탐라는 백제에게 벼슬을 받는 속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문무왕 19년(679년) 2월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는 기록과, “애장왕 2년(801년) 10월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신라의 속국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백제국본기>를 보면, “문주왕 2년(478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왕은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恩率)의 관직을 제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탐라국이 백제에게 관직을 받는 속국임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기록이 있는데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위덕왕 36년(589년)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하였다. 전선 한 척이 표류하여 탐모라국(耽牟羅國)에 온 일이 있었다. 그 배가 돌아갈 적에 국경을 경유하므로 왕이 노자를 후하게 주어 보내고, 동시에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수 고조는 좋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백제왕이 진을 평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표를 올렸다. 왕복이 지극히 어려워 만약 풍랑을 만난다면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니, 백제왕의 마음과 행적이 순박하고 지극함은 내 이미 아는 바다.

서로의 거리는 비록 멀다지만 사정은 만난 것과 다름없으니 어찌 반드시 자주 사신을 보내와야만 하겠는가? 이후로는 해마다 입공(入貢)이 필요하지 않으며 나도 회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알고 있을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문은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隋書)>에서 중요한 내용이 많이 삭제된 기록이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한다)

<일본서기> 제명여왕 7년(661년) 기록에 따르면, “5월 23일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지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유년 4월 1일 월주(越州)로부터 상로(上路)로 동에 돌아오려 하였다. 8일 새벽에 서남풍을 따라 배는 대해로 나왔다. 해중에 길을 잃어 표류하여 신고하였다. 9일 8야로 겨우 탐라도에 도착하였다.

섬사람 왕자 아파지들이 9인을 초대하고 위로하여 같이 객의 배에 태워 조정에 가려고 하였다. 5월 23일 조창(朝倉)의 조정에 나아갔다. 탐라가 입조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천지왕 4년 9월 “탐라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5년 정월 “탐라가 왕자 고여(姑如)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일본서기의 월주(越州)라는 지명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배는 동지나해상에서 태풍을 만난 것으로 보이며, 서남풍을 따라 (즉 강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와) 큰 바다로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동지나해상에서 표류한 배가 과연 제주도까지 올 수 있을까? 제주도로 표류한다는 것은 해류의 흐름을 보면 어림도 없는 일로 아마 대만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탐라는 백제에게 벼슬을 받는 속국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과 섬인 것은 분명하나 그 위치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단군조선으로부터는 아주 먼 거리이고 백제/신라/왜와는 꽤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일본서기>를 통해 마치 탐라가 동지나해상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뿐이다. 

▲   중국, 한국, 일본 주위의 해류의 흐름. 적색은 주 해류이고, 청색은 연안해류이다.  대만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있어도 일본 열도로 갈 수 있다.  수나라의 전선이 표류해 제주도에 왔다는 것은 해류의 흐름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수서(隋書)를 통해본 탐라국은 어디?

일본의 전신인 왜는 중국대륙의 양자강 이남의 동남부에서 활동하다가,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언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대만을 주 근거지로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만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젓거나 돛을 달지 않아도 해류의 흐름만으로도 일본열도로 쉽게 갈 수 있다.

왜가 대만에 쉽게 자리 잡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대만에 있던 담모라국(聃牟羅國) 은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속국)의 하나로, 대만은 원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담모라국은 탐모라국(耽牟羅國) 또는 탐라국(耽羅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 담모라국의 聃자는 귀耳변 대신에 몸身변이 들어가나 워드에 없어 편의상 聃으로 쓴다)

결론부터 말해 탐모라국 즉 탐라국이 지금의 제주도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낸 분은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소진철교수이다.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수가 있다. “아니 어떻게 지리학자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닌 정치학교수가 어떻게 이런 이론을 찾아낼 수 있느냐? 그거 믿어도 되는 이론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의문에 대해 필자는 “현 대한민국의 사학이론은 일제 때 조선인을 세뇌교육하기 위해 만든 식민반도사관의 이론으로 완전히 우리의 고대사를 엉터리로 축소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사학계는 정신이 썩어있기 때문에 망국의 반도사관 이외에는 어떠한 참신한 이론이 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비사학도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봐야 참된 진실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소교수가 찾아낸 수서(隋書) 권81 열전(백제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진(陳)나라를 평정할 때, 한 전선이 표류해서 바다 동쪽의 담모라국에 도달하였다. 이 전선은 백제를 경유하여 돌아왔는데 이 때 백제왕 창(위덕왕)은 물자를 후하게 보내고 진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같이 파견하였다.  (중간 생략) (백제에서) 남쪽바다로 3개월이나 걸리는 먼 곳에 담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가 수백리에 이르고 그 땅에는 노루가 많이 있고 백제에 부용되어 있다.”

平陳之歲 有一戰船 漂至海東聃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并遣使奉表賀平陳 髙祖善之下詔曰百濟王既聞平陳逺令奉表往復至難若逢風浪便致傷損百濟王心迹淳至朕已悉知相去雖逺事同言面何必數 然璋内與髙麗通和挾詐以窺中國七年帝親征髙麗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帝大悅厚加賞錫遣尚書起部郎席律詣百濟與相知明年六軍度遼璋亦嚴兵於境聲言助軍實持兩端尋與新羅有隙每相戰爭十年復遣使朝貢後天下亂使命遂絶 其南海行三月 有聃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이 기록은 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위덕왕 36년(589년)의 기사와 흡사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중요한 기록이 많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담모라국이 어디인지 알 수 없기에 독자들은 제주도를 상상하게 된다. 즉 담모라국의 위치와 크기가 생략되어 있고, 백제의 부용국(속국 또는 보호국)이라는 기록도 안 보이며, 經于國界라고 적어 전선이 제주도에서 수나라로 직행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대만은 남북으로 길쭉한 섬으로 동서로 길쭉한 제주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담모라국이 대만인 이유는?

1) 수나라의 전선 1척이 황해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표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중국 동부연안에서 제주로 오려면 횡단항해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국의 내해인 발해만으로 올라갔다가 한반도쪽으로 내려오는 연안 해류를 타야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수군에게 걸리게 되어있어 그렇게 표류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담모라국은 중국 동부연안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2) 담모라국은 백제에서 남쪽바다로 3개월 걸린다는 먼 거리에 있다. 우선 이 기록은 제주도와 맞지 않는다. 반도사관으로 볼 때 백제의 충남 해안에서 제주도까지 3개월은 커녕 3주도 걸리지 않는다. 3일에서 최대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본다. 

3) 수서에 기록된 담모라국의 크기는 동서 수백리이고 남북 천여리 된다 하였으니 담모라국의 모양은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라 하겠다. 그런데 제주도는 동서 축이 75km, 남북 축이 35km로 동서로 길쭉한 모양의 섬으로 사서상의 담모라국과는 크기는 고사하고 우선 모양부터 다른 섬이다. 대만은 동서간 144km 남북간 386km로 사서의 기록과 크기도 비슷하고 모양도 남북이 길쭉한 모양이다.

4) 대만은 노루가 많은 섬이다. 예전에 대만은 이주(夷州)로 불렸다. 참고로 이주의 이(夷)자와 대만의 대(臺)자는 같은 글자로 봐야 한다. 후한서 동이전 왜조에는 “사방이 산과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고, 사람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녹각(鹿角)으로 창을 만들어 전쟁에 쓰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만의 서안에는 녹항(鹿港)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주 거래 품목이 노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동지나 해상에서 태풍으로 조난당했을 때 배는 대만지방으로 표류한다고 했다. <삼국지 오서>에 따르면, “단주(亶州)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거기 사람들은 때로는 회계(會稽 절강성)에 와서 포목을 사간다. 회계의 동치현(福州) 사람들이 배로 또는 태풍에 조우해서 류이(流移)해서 단주에 닿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단고기>에 보면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과 “단주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소진철교수가 이러한 기록을 찾아내기 전까지 사학계에서는 담모라국을 모두 제주도로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 내용만으로는 담모라국이 제주가 아니라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게 기록되어 있다. 만일 수서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소교수가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담모라국이 대만이라는 역사의 진실은 영영 햇빛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담모라국이 제주도가 아니고 대만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탐라국은 제주도라고 우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이런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적인 식민반도사관을 고수하기 위해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담모라국이 대만이었다는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는 그 날이 매국적인 친일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제삿날(?)이 되기 때문이리라.

백제의 담로는 어디까지인가?

게다가 소교수는 표류한 전선이 수나라의 배가 아니라는 견해를 내 놓았다. 필자도 소교수와 같은 견해로, 수나라는 낙양을 도읍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던 나라이므로 전선이 동지나해상으로 표류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당시 기록으로는 수 문제 때 수나라는 대륙 동쪽에 있던 백제/신라와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동쪽으로 전선이 나올 이유가 없고, 게다가 <수서>가 전선의 표류 사실을 유독 백제조(條)에 기록한 것은 그 배의 주체가 백제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교수는 백제가 설치한 요서.진평군(遼西.晉平郡)의 진평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중국역사지명사전>에 따르면, “진평군은 태시(泰始) 4년(468년) 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 진안군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요서군은 산서성 태행산맥 안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   이주는 대만의 옛 지명. 백제는 대만 건너편 대륙의 복주(福州)에 진평군을 세웠다. 적색 원은 고구려 문자명왕이 신라인을 이주시킨 천주이며, 천주 위쪽이 복주이다. 그리고 절강성 회계(會稽)는 월(越)지역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라는 기록을 보면 백제가 양자강 이남의 오.월 지방 진출을 알 수 있다. <당서>와 <구당서>에서도 백제의 경계를 “서도해지월주(西渡海至越州)”라고 해서 백제의 절강성 진출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기록된 유.연.노.제.오.월의 위치.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의 동부지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대만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담모라국은 백제 22담로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사 연구가 김성호선생은 담모라(聃牟羅)의 어원으로 대만의 타이뻬이(臺北)시의 ‘담수항(淡水港)’과 까오슝(高雄)현의 담수사(淡水社)를 들고 있다. 또한 일본의 세도(瀨戶)내해(內海)의 아와지시마(淡路島) 등도 백제 담로계 발음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탐모라국은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속국이 된다.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였다면 탐모라국(대만)을 부용국(속국)으로 만들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 이유도 없고 또한 관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서에 저러한 기록이 남을 수도 없다. 담모라국에 대한 수서의 기록은 백제와 신라가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백제의 주 활동무대는 산동성으로 보이며, 중국장수전전에 따르면 호남성에 백제의 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오.월을 침범하여 분국인 왜를 지배하고, 광서장족자치구에 흑치국이란 제후국을 만들고, 담모라국인 대만을 부용국(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것도 <수서>에 의해 확인되었다. 

▲  백제는 해양대제국으로 22 담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한반도와 열도에도 담로 형태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제가 주변국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품목에 보면 낙타가 들어 있는데, 낙타는 중동지방이 주 산지이므로 백제가 중동지방까지 갔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 아니겠는가? 아직 확실한 기록의 근거는 없으나 심증으로는 첨단의 해양기술을 발판으로 백제는 아라비아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강력했던 해양대제국 ‘백제’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지만 우리들 가슴 속에는 아직도 그윽한 향수와 안타까움이란 단어로 남아 있다. 워낙 공포의 대상이었던지라 역사의 승리자들에 의해 철저히 감춰지고 왜곡되어진 위대한 제국 백제의 진실이 밝혀지는 그 날이 이 나라의 역사가 바로 서는 날이라고 보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환하게 밝아질 수 있는 날일 것이다.

김성겸 08/07/16 [18:28] 수정 삭제  
  훌륭하신 정리를 해 내시었습니다.

을 로 읽을 수 있다면, 을 로 쓰고 읽었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 08/07/16 [22:59] 수정 삭제  
  에 보면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다.”

.....왜 위치가 오키나와 지역포함 일본열도을 의미...뒤 내용도 그대로 넣으시요.자기들 유리한 것만 적지말고. 오키나와 지역도 대남이나 동남아지역처럼 아열대지역이다보니 일본군들이 모자를 그렇게 쓰는거 당연한거니 너무 오버해석들 맙시다.

탐라나 담라나 담로 다 같은 말....대만은 '담모라'.. 제주도는 '담라(탐랑.탐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음..
성훈 칼럼리스트 08/07/16 [23:25] 수정 삭제  
  에서 나오는 문장인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거기서)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那覇)에 이른다. 또 다시 천리를 건너서 근도(根島)에 이른다......”는 문장을 잘 봐야 합니다.
여기서 이 문장이 가르키는 왜의 위치는 육지(절강성)를 뜻합니다. 거기(육지인 왜의 위치)에서 배로 9,000리를 건너면 나패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왜(일본)는 절강성에 있었지 일본 열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왜와 일본열도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담모라 = 탐모라 = 탐라 = 오늘날 대만
수나라에서는 남의 나라(백제)에서 벌어진 일이라 지명을 정확히 모르다보니 탐모라를 담모라로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탐이나 담이나 중국 발음은 같습니다.
그리고 탐라와 제주도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후대에 와서 역사왜곡을 한겁니다.
라디오 08/07/20 [04:14] 수정 삭제  
  광개토왕의 염수는 이스라엘 사해이다..

라디오를 믿어라.. 멍청한 넘들..
감동은 08/07/23 [12:01] 수정 삭제  
  언제나 우리 사학을 이끄시는 성훈님께 고마움을 느낍니다..계속 좋은 역사의 화신이 되어주십시요..
텔레비전 08/07/23 [12:32] 수정 삭제  
  한심하군요.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대충 "탐라는 대만"이라는 전제하에 각종 지명이나 사서의 기록들을 끼워 맞추는 모습이 한심할 뿐입니다. 그건 애시당초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죽도 08/07/26 [05:45] 수정 삭제  
  전율이 일정도로 놀라운 사실적 증거와 접근이고만 왠 헛소리요 그러는 당신이 반박 증거라도 올려봐!텔레비만 쳐보나!!!!!!!!
엉터리 08/08/03 [08:32] 수정 삭제  
  성훈님의 열정에 찬사는 보내지만 엉터리 가상공간의 역사 스토리는 가상일뿐...
좁은 한반도를 탈출 하려는 소국인의 희망사항일뿐 현실을 떠나선 안돼...
지금에 오ㅏㅅㅓ 중ㄱㅜㄱ ㅂㅗㄴ토를 차지하게ㅆㄷㅏㄴㅡㄴ 것인지? 독도나 지킬일이다.
미주한인 08/08/10 [08:51] 수정 삭제  
  어제 Georgia와 Russia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언론은 Georgia를 모두 '그루지아'라고 쓰더군요. '조지아'라고 해야하지 맞지 안나요?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그루지아' 라고 쓰더군요. 그럼 한국언론은 아직도 모두 일본앞잡이들의 후손들인가요? 제대로 된 역사를 찾으려면 아직도 멀고도 멀게 느껴지는 군요...
08/08/24 [03:15] 수정 삭제  
  풉 괜히 할말없으니 저러시네.. 반박을 해봐요 반박을.. 그래야 인정될거아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온 08/09/15 [23:18] 수정 삭제  
  백제의 영광은 신라에 의해 갈기갈기 축소
시온 08/09/15 [23:19] 수정 삭제  
  충분한 근거가 되는군요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