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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령왕릉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삼국시대의 왕릉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8/05 [13:53]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령왕릉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삼국시대의 왕릉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8/05 [13:53]
본 글은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 땅에 묻혔나?”(1부)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의 새로운 해석
 
앞에서 언급한 것을 종합한다면,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백제 땅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의 손을 빌어 타국 땅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지석의 명문인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이다.

왕릉 조성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훗날 파묘될 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조치를 미리 지석의 명문으로 새긴다는 것은 분명 무령왕릉지인 공주가 백제 땅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혹자는 실제적인 토지거래로 돈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지신(地神)에게 고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지신에게 고하는데 이천석이란 정확한 금액이 표시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가 과연 필요할까? 이 문구로 인해 필자는 이 토지의 거래는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거래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 무령왕릉은 지석을 능 안에 넣는 대신 피장자의 신분을 밝히는 비석은 안전상 외부에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결국 이 문구는 “지신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이므로 소유권이 있으니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아무도 이 묘를 건드릴 수 없다”라는 내용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파묘로부터 안전을 담보해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구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본다.  

▲ 무령왕릉 발굴 당시를 재현해 놓았다. 처녀분으로 발표되었으나 유물이 많이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미리 침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몰래 지석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그리고 지석에는 무령(武寧)이라는 시호를 쓰지 않고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고 새겨 놓았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따르면, 영동대장군은 양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사마(斯摩)는 대왕의 휘(이름)이다. 백제인들이 지석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인 성왕의 주관 아래 정상적으로 장례를 지내고 능을 조성했다면 즉 백제 땅에서 백제인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다면 이런 문구가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도 “23년 여름 5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무령으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夏五月 王薨諡曰武寧) 참고로 김부식은 삼국의 모든 왕의 죽음을 崩이라 안쓰고 薨이라 썼다. 왜 지석에 523년 왕의 시호인 무령을 안쓰고, 왜 굳이 양나라로부터 책봉받은 벼슬인 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썼을까? 이유는 단 하나 뿐으로 공주의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능을 조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고구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다음과 같이 새겨놓았다. 아래에 다시 언급한 무령왕릉 지석의 문장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전하여 17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리셨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皇天)과 같고, 무예와 위엄은 사해(四海)에 떨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그 생업(직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여, 오곡이 풍성하였다.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 9월 29일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여 새겨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시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올려 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대비가 수를 다해 돌아가시니 서쪽 땅에 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다시 대묘를 만들었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은 전건(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위의 광개토태왕 비문과 무령왕릉 지석 명문의 차이는 뚜렷하다. 광개토태왕 비는 아들인 장수왕과 고구려 백성들에 의해 고구려 땅에서 능지가 조성이 되었고 온 국민이 추모하는 마음으로 비석을 세웠기에 시호와 연호가 당연히 들어가 있고 온통 태왕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문구뿐이다. 여기서 호태왕의 휘인 담덕(談德)이란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인 '금동신발'
그러나 무령왕릉은 왕이 독살 당한 사실을 아들(성왕)이 감추느라고 쉬쉬하다보니 결국 타국에서 다른 나라사람에 의해 능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양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책봉한 벼슬(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사마)이 함부로 쓰이고, 업적 찬양의 문구는 없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매지권을 작성해 안전권을 확보한 문구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의 죽음에 관한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보다 무령왕릉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밝혀줄 기록이나 다른 유물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엔 어떤 나라가 있었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믿기 싫어하며,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필자의 글에 심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국민들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런지 망국의 반도사관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은 한반도가 삼국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한반도가 삼국의 영토가 아니란 말이 아니다. 한반도는 삼국의 변두리 강역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지대 즉 대대로 신성한 소도(蘇塗)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 무수히 널려 잇는 고인돌이 그 증거이기도 하며, 한반도에서는 고대 전쟁 유물이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우리 조상들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서 활동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족에게 밀려 변방인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 시기는 고려 초로 보이며 근세조선 때까지도 만주를 잃은 적이 없었다. 명나라 사서인 <명일통지>에도 분명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기록은 간도(만주)가 조선의 영역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물적 증거인 것이다.  

▲   명나라 사서에 기록된 조선의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 이것이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가 단군조선 이후 BC 195년 최숭이 낙랑국을 세워 한반도는 낙랑국의 강역이 되었다가, 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A.D 503년 신라의 지증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립국가의 길을 걷는다. 무령대왕이 붕어한 A.D 523년 경에는 한반도는 동신라의 강역으로 보인다.

▲ 신라의 전신인 사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양직공도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도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 이사금(尼師今) 등으로 불렀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 때 비롯되어 왕이 죽자 지증이란 시호를 처음 쓴다. 

신라는 503년 이전에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왕 시절부터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대왕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륙신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양나라의 공직공도로서 백제 사신의 그림과 함께 백제를 설명하는 글에 보면,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는 문구가 있어 신라가 당시 백제의 속국(부용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서는 동신라가 원래부터 속국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지증왕 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신라세력이 커져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A.D 450년 이후의 고구려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지증왕 이전의 신라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남당선생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을 연결시키면 무령왕릉의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백제 성왕이 두려운 무령왕의 추종세력들이 독살당한 왕의 시신을 3년상을 치르기도 전에 몰래 빼내, 얼마 전까지 속국이었던 대륙신라에게 장례를 부탁했던 것 같다. 대륙신라 역시 성왕에게 탄로날 것을 염려해 한반도의 동신라에게 무령왕의 장지를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물론 기록에 근거를 두었지만 필자의 추정일 뿐 역사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아니고서는 현재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수가 없다. 분명 백제의 주 활동무대인 대륙에 있어야 할 왕의 무덤이 느닷없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이 기이한 일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무령왕릉은 가짜다. 누군가가 고의로 지석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삼국의 주무대가 대륙이라고 해서 한반도에 삼국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이 살기 좋은 금수강산 한반도에는 고조선 마한의 도읍 --> 낙랑국의 도읍 --> 고구려의 영역 --> 동신라의 영역으로 대를 이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백제는 장기간이 아닌 짧은 기간 담로라는 형태로 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삼국의 왕 중 유일하게 무령왕릉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근거가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가 한반도에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

그리고 남당 고구려 사략/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은 <산해경>과 <남서>에 언급되어 있는 평화지역이며, 함초가 나는 지역이며, 불교가 전래된 동쪽지역인 부상국(扶桑國)이 한반도이며 부상국=우산국(于山國)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부상국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망국의 반도사관을 믿으면 안되는 이유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의 발굴을 계기로 더욱 더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확장지어 버린다. 자신들의 엉터리 이론을 무령왕릉이란 확실한 유물이 뒷받침해 주니 이거보다 더 낭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필자가 툭하면 식민사학이니 반도사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그게 그렇게 매국적인 것인지 반문할 수 있다.

반도사관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빼기 위해 만든 역사이론이다. 당시는 일제치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으나, 문제는 광복 62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사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이론을 버젓이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민족혼을 빼고 있으니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망국의 한국의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도
그것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에 의해 기용된 이병도/신석호/홍희로 대변되는 국사학계의 큰 독나방 몇 마리가 뿌리고 간 독가루가 이 나라 역사를 온통 흑탕물로 뒤범벅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학교의 강단을 점령한 그 후학들은 아직도 똑같은 독가루를 온 국민들에게 뿌려대고 있다, 여하튼 조상의 역사를 좀먹는 나쁜 독나방들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특효약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 국민들이 반도사관을 절대로 신봉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라면 마한으로 대변되는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란 이야기이다.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는 한(韓)을 세운 왕은 번(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으로,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수도를 넘겨주고 남하하여 한을 세운다.

그렇다면 기준의 번(기자)조선은 한반도 남부인 한의 북쪽이므로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이 말은 위만조선이 평양에 있었다는 말과 같고,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섰으니 결국 한사군은 북한 지역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반도사관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식민반도사관의 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단군은 국가가 아닌 신화이고, 북한 땅에 중국인이 세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나타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한나라가 식민지인 한사군을 설치한다. 따라서 조선의 조상들의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므로, 지금은 천손민족인 천황의 일본이라는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일본서기>에만 나와 있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三韓政伐論)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고 있다. 결국 반도사관의 주제는 북한 땅에는 한사군이 있었기에 중국 땅이고, 남한에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장벌했기에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땅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반도사관은 무서운 이론이며, 망국적인 식민반도사관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오히려 중국 사서가 한사군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의 사학계는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중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창려(진황도시)였다.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어디로 남하했느냐가 우리 역사의 최대 핵심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망국의 반도사관의 핵심은 기준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삼한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기준이 남으로 내려 간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번조선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평야지대의 중심인 황하와 회수 사이로 간 것이었다. 그 땅은 기준의 조상인 기자가 산 하남성 서화(西華) 땅과 죽어서 묻힌 안휘성 몽성(蒙城) 땅과 가까운 곳이다. 기준은 비록 수도인 창려를 위만에게 빼앗겼지만 자기와 연고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던 것이다. 

▲  기준이 남하해 한(韓)을 세운 위치는 기자가 살던 지역으로 하남성, 안휘성, 산동성, 강소겅 일대이다. 유.연.제.노.오.월 즉 대륙동부는 원래부터 번조선의 강역이었다.

결국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반도사관은 역사적 사실도 아닐뿐더러 이렇듯 우리의 강역을 이민족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무서운 망국의 이론인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근거해 중국대륙 동부가 원래 우리의 강역이었음을 알리는 것만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무력화시키고 분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루빨리 식민사학을 추방하는 길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망국의 반도사관을 이 땅에 확정시키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된 것이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제 새로이 무령왕릉 지석을 해석함으로서 반도사관은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바이다.


조재범 08/08/05 [22:40] 수정 삭제  
  역시 님의 글은 보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쭉 건필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하나 더. 신라는 서신라 동신라가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307년(기림이사금 10년)에 국호를 신라로 돌렸다.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림 이전에 신라란 국호를 썼다는 얘기겠죠? 그런데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로 확정할 때 계림과 서라벌이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증왕 때 국호를 정한 신라는 그 전신이 계림이 아니었고, 기림 때 국호를 정한 신라의 전신이 계림인 것입니다. 또 서라벌은 처음에 단 한번만 언급될 뿐 뒤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서라벌이 국호가 아닌 증거라고 봅니다.
즉, 박혁거세가 처음 쓴 국호는 신라이고 석탈해 때 계림, 기림 때 신라로 한 나라가 있고 그것과 상관없이 고구려에서 독립한 신라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중립사학 08/08/05 [23:14] 수정 삭제  
  사마왕 무덤은 무령왕릉이 확실한데, 백제사람이 아니라서 "영동대장군"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는 것인데...
만약, 백제인이 만들었으면 무령왕이라고 적었을 것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 만들었기에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라 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외국에서는 백제임금을 영동대장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외다.

생각해보쇼.

성훈씨의 말은
그 시대에 대내외적으로 "무령왕은 영동대장군이다"라는 것이 공인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요.
더 쉽게 이야기하면, 대외적으로 백제는 지나국의 제후국이었다는 것을 성훈씨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오.
알겠소?

대체 누굴 위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이건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글이구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남당사료를 근거로 짜맞추다보니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것이 됐구려. 이제야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하.
누구편이요??
중립사학 08/08/05 [23:22] 수정 삭제  
  참내...

얼핏 보면, 백제는 중국땅에 있었고, 무령왕의 장례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지내졌고, 그 장지가 다른 나라 땅이었기에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라는 지석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 역사를 드높이려는 의도는 있어보이나....]

그러나, 더 면밀히 검토하면...
그 당시 대외적으로 백제는 "영동대장군 사마왕" 즉 다시말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요.

쯧쯧.
신라인 08/08/06 [01:03] 수정 삭제  
  내 나라 왕도 아니라 그냥 왕의 이름인 사마를 불렀소이다.
우리나라는 얼마전까지 백제의 속국이라 속이 상했는데, 마침 잘되었다싶어 양나라에서 보낸 영동대장군을 쓴 것이오. 즉 일종의 보복이지요. 원래 한족들은 동이족의 큰 나라의 왕을 자기네 대장군으로 봉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오. 상대방이 받던 안받던 일방적으로 보내고 자기네 역사책에 봉했다고 기록하는 놈들이요.

중립사학님도 반도사관을 신봉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 민족사학을 공격하고 헛소리나 하고 계시지....
중립사학 08/08/06 [01:19] 수정 삭제  
  영동대장군을 양나라에서 보냈다는 것은 백제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수치요.
그런데 백제가 그것을 받고나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제 내부에서도 암암리에 중국의 속국을 인정했다는 뜻이요.
영동대장군 작위를 받고나서 양나라와 전쟁했다는 기록이나 항의했다는 기록을 한번 찾아보소.
없다면 신라인의 주장은 억지요.

또한, 마침 신라땅에 무령왕이 장사지내게 되었다고 하여, 신라인들이 영동대장군을 썼다는 것은 신라도 백제는 영동대장군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밖에 더되오?
말도안되는 소리 하지 마소.

뭐가 반도이고 뭐가 민족인지 모르는 자들이...
백제를 중국에 있다고 주장하려다보니, 무령왕이 양나라 속국이 되었구랴..
참내 이런 자들이 민족사학인녜 뭐녜 해대니,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고 있지.
누가 그럽디다.
저렇게 무조건 중국에다가 고대 우리 영토를 밀어넣는 것은 무당의 뻘짓거리라고.

사마왕릉지석은 가짜요.
하하하웃긴다 08/08/06 [01:45] 수정 삭제  
  요즘 새로 뜬다죠?

일명 대륙식민사학이라고...

무조건 저쪽 서쪽에다가 영토를 집어 넣기만 하면
속국이 되던 말던 아무런 상관을 안한다는..
그런 부류들....

뭐가 뭔지 도대체가 개념이 없어요.
치우 08/08/06 [07:18] 수정 삭제  
  정신 삭월세 나간 댓글 단,
이 등신 인사들아....!

너의 새끼와,
그 다음 후손들도 너를 본받아,
지나에게 쥐어 터지고,
저~~왜에게 상시로 할퀴어,
너의 피를 한탄하게끔 될 날이 반드시 온다.

단 너의 핏줄만.
관심자 08/08/06 [09:42] 수정 삭제  
  삼국이 china에 있다가 한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china측에서 고마워할 일이 아닌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수긍이 간다면 하늘이 두쪽나도 진실을 외면해선 안되겠지만 이 사람들(coo2.net에 있는 사람들), 내가 볼 땐 한국사람이 아닌 것 같다.

china를 왜 支那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네들 말데로라면 한국이 지나가 되야지!

삼국은 박창범교수에 의한 일식추정지를 참고할 때 한국에서 갈라져 나간 나라이다. 삼국사기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 나라의 지배층이 전부 외부에서 들어왔는데 그 외부가 어디이겠는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봐라. china이겠나, 아니면 바이칼이겠나?
라디오 08/08/06 [12:50] 수정 삭제  
  헛소리하지 마쇼..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있었다가 정답이오.

다들 부정하느라 찔찔매지...

양 직공도의 원문의 上巳文(상사문)이 上己文(상기문)으로 보이나? 눈이 삐엇군.
일본서기 원문을 찾아 보시지?
어떻게 나오나 찾아 봐...

맨날 남 글이나 퍼 나르지 말고.. 스스로 찾아 보란 말이다.
mimesis 08/08/06 [16:29] 수정 삭제  
  한반도에 있다고 헛소리 여태 하는 놈들은 뭐하는 놈들일까.
관심자 08/08/06 [19:59] 수정 삭제  
  왜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본서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韓子(者인지 모름)에 대해 설명하기를 韓子란 大日本人과 蕃國人女사이에서 난 사람을 가리킨다.-여기서 한자란 한국(번국)의 사람을 말할 것이고 대일본인은 보나마나 그들이 말하는 신의 나라 고천원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고천원이란 누구나 현 korea를 말하는 것이라 동의할 것 입니다. 그러면 백제가 왜에 하사(진상)했다던 七枝刀를 봅시다. 박창범교수의 일식추정지를 보면 왜는 china 동남부로 나옵니다. 왜 china가 支那인가?? 과연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나온것일까? 제가 볼땐 고대 korea로부터 枝刀를 받던 枝國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china, 支那라는 생각입니다.
관심자 08/08/06 [20:09] 수정 삭제  
  백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맨 처음 십제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비류백제(?)를 합치고 백제가 된 것이지요. 10->100입니다. 한국은 총 78개국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습게도 양직공도에 22담로가 나오는데 합치면 100입니다.

백제에 대해서 백가제해라는 이상한 말들을 역사에 기록하는 데 바다를 건너갔다는 말은 맞는 것 같군요. 그 방향은 korea---> china입니다.
중립사학 08/08/06 [21:14] 수정 삭제  
  다들 통계공부좀 하쇼.

통계라 의미가 있을때에는 측정값에 오차가 없을때만 그렇소.
그렇기때문에 통계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오.

박창범교수의 논문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이 부분에 백제가 있을 확률이 몇%일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이오.
그런 것을 가지고 확정지어 백제땅은 여기다(즉 확률이 100%다)라고 말하는 것은 박창범교수를 욕보이는 것이요. 다들 통계가 뭔지 모르니 100%라고 하는겁니다.

만약, 박창범 교수가 일식기록을 보고 백제(기타 삼국)의 위치가 어디에 있을 확률이 100%다라고 말했으면 박창범교수도 거짓말을 하는겁니다.

결국 세연님도 통계가 뭔지도 모르고, bootstrap를 하고 있는데...
측정값이 얼마나 있다고 저 기법을 사용하는지 참 어이가 없소이다.
측정값의 오차를 얼마나 어떻게 제거했는지 묻고싶소.

일식기록에 오차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많소이다.
일식기록이 과거 몇백년 혹은 몇천년부터 관측되어 기록으로 내려오는데..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썼을 가능성도 있고,
그때와 지금 달력이 달라서 진짜 그날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도 않으며,
김부식이 천문현상에 무지하여 천문기록을 옮겨적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다른나라 기록을 가져다가 베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능한 모든 오차를 고려하지 않고 드립다 일식기록으로부터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오.

"통계는 통계일뿐 오해하지 말자!!"
중립사학 08/08/06 [21:28] 수정 삭제  
  현대 사학의 흐름을 한번 보거라.

속지주의 사관이 요즘은 대세니라.

그런데, 백제가 중국땅에서 건국하여 중국땅에서 망하였으면 그게 중국역사지 우리나라 역사냐?
찬란한 백제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로 만들려거든,
백제의 도읍을 우리나라에 비정하고 난 뒤에...
백제가 서쪽을 공격하여 땅을 빼앗고 영토를 넓혔다고 주장하거라.
이래야 백제가 우리나라 역사가 되는 것이다.

성훈씨처럼 무조건 반도에 넣으면 식민사학이라고 하는 말도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역사를 주먹구구로 짜맞추다보니, 이런 말두 안되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민족사학이랍시고 내세우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구나.

이 글보면 짱깨들이 무지 좋아하겠다. (얼씨구나 백제도 짱깨역사 되겠네)
관심자 08/08/06 [22:27] 수정 삭제  
  님께서는 한 번 논문을 읽고 비판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논문구하시기 힘드시면 "하늘에 세긴 우리 역사"라는 책도 있으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기에 보면 한중일에서 명멸해 나갔던 모든 나라의 일식추정지가 나오는 데 모두가 현재의 그 나라가 있을 것이라는 곳과 일치합니다. 님께서 의심하시는 모든 부분도 읽으보시면 의문이 풀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립사학 08/08/07 [00:30] 수정 삭제  
  관심자님께서 읽어보라시기에 읽어봤습니다. 역시나 coo2의 주장은 말도 안됩니다.
이제 박창범교수의 논문을 가지고 일식최적관측지가 삼국의 위치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다.


"일식최적관측지"="각국의 도읍 혹은 일식관측지"


이게 맞느냐? 틀렸습니다.

최적관측지라는 것은 식분蝕分이 큰 값을 갖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일식기록에 개기일식이냐 금환식이냐 부분일식이냐를 구분하여 적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분일식도 일식으로, 금환식도 일식으로, 개기일식도 일식으로 적었습니다.

따라서 삼국의 위치는 박창범교수의 논문 그림 중에 식분값이 있는 곳이면 다 일식관측지점이라 것이고 삼국의 위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식최적관측지점은 식분값이 큰 일식관측지점이라는 말이지만, 삼국사기의 일식은 개기일식만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분일식 혹은 금환식, 즉 식분값이 작은 일식도 기록에 포함되었으므로 최적관측지점에서 벗어난 지역에 삼국사기 일식관측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박창범교수의 논문을 잘못이해하여 벌어지는 이런 사태는 재야사학계가 반성해야합니다.
논문이 틀린 것이 아니라 과학이 뭔지도 모르는 재야사학계가 잘못해석한 것이군요. 박창범교수도 이를 알기에 제목도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이라고 하였지요. 만약 coo2의 주장이 옳다면 박창범 교수는 제목을 "천문현상에 의한 삼국 위치 재고"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쉽게말해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모두 개기일식을 적은 것이라면 coo2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으나 삼국사기 일식기록은 모두 개기일식이 아니므로 coo2의 주장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박선생 08/08/07 [00:49]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 이론은 통계가 아니고 과학이다.
과학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들어와 박교수 이론이 어쩌니 하는 것은 단지 민족사학 흠집내기 뿐. 박교수 이론을 뒤집으려면 박교수 이론만한 논문을 중립 사학이 내놓아야 할듯. 그런 실력도 없는 인간이 나서서 일식이 어쩌구 하는 것은 그냥 흘려 버리세요. 즉 할 일이 얼머나 없으면 저럴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중립사학은 강단에게 용돈받고 아르바이트 하는 것이니 귀담아 듣지 마세요. 그런 푼돈에 눈멀어 저러는 인간하고는 상종을 맙시다. 이병도나 중립사학이나 둘 다 민족반역자입니다.
중립사학 듣거라.
그래도 자네같이 하찮은 인간을 이병도와 같이 언급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고맙다고 하거라. 이 이병도보다도 못한 인간아.
중립사학 08/08/07 [01:16] 수정 삭제  
  꼭 머리모자라고 멍청한 것들이 논리로 반박 못하면 욕하고 난리더라.
너두 coo2지?

박교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너네 coo2가 논문이해를 잘못했다는거다.



(최적관측지점) ≒ (개기일식관측지점) 이라는거고...
(최적관측지점) ≠ (삼국의 위치) 이라는거다....



머리는 뒀다가 욕할때만 쓰지말고, 이런거 이해하는데도 좀 써라.
논리와 머리가 안되면 욕하는 쉑들이 무슨 역사를 복원한다고 설치냐.
진짜 천문공학박사 08/08/07 [12:09] 수정 삭제  
  일식도에서 그냥 최적관측지라고 했을 뿐, 그게 삼국의 삼국의 위치라고는 안했음.
중립사학이 공학박사가 아닌 이유는 아래와 같음.

고구려,백제,신라의 일식을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는 전체 위치에 분명 한반도가 들어간다.
* 집안은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하나도 볼 수 없는 위치이다. 따라서 집안은 고구려의 조작된 수도이다.
* 백제의 부분 일식을 한반도에서도 모두 볼 수 있다.
* 그런데 신라의 초기 일식 기록 중 2개의 일식을 부분으로도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즉 한반도는 초기 신라의 강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초기 신라의 강역이 아니므로 한반도는 백제의 강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라의 일부 일식을 한반도에서는 부분적으로라도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논리를 펴는 방식으로 박교수의 이론을 반박해야지, 아무런 근거도 제시 못하면서 부분일식이 어쩌구 하는 겁니까? 부분일식이란 용어는 중학생이면 다 아는 용어요.

당신 공학박사 맞소? 공학박사 맞으면 어느 대학이고 학위 번호를 대보슈.
그리고 공학박사라고 해서 천문학을 다 이해한다고 하면 곤란하오. 엄연히 분야가 틀리기 때문이오. 그런 상식을 모르니 분명 중립사학은 공학박사가 아닙니다.
당신 강단의 알바 아니오? 일당 얼마요?
중립사학 08/08/07 [13:00] 수정 삭제  
  이게 바로 측정값의 오차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천문학만 했으니 측정오차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지 모를거요.

신라초기 일식기록 중 2개의 일식을 반도에서 볼 수 없는 이유가 측정오차이기때문일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하고, 초기 일식 2개가 반도에서는 볼수 없다고 신라를 저기 중국에 몰아넣는 것은 통계가 뭔지 모르는 순수과학을 한 자들이나 하는 이야기요. 반도에 없는 2개는 측정오차라는거요. 알겠소?

따라서, 초기기록 2개가 측정오차냐 아니면 신라가 정말 중국땅에 있었냐는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야 하는거요. 알겠소?

그러나, 너희들 coo2는 이걸 모르고 그냥 신라가 중국에 있었다고 하고 있으니 틀렸다는거요.

통계처리를 한번이라도 한 자라면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 못할텐데.
망원경으로 별만보고 산수로 계산하니 저런 이상한소리를 해대지.
순수과학만 한 자들이 실용학문에 적용을 하려니 데이터를 순진하게 믿는 바보짓을 한거요.

난 손가락 3개에 꼽히는 명문대학 공학박사니 염려는 마슈.
천문학은 모르나 데이터를 가지고 어떻게 결론을 도출해야하는지는 아오.
즉, 반도에서 관측안되는 2개의 일식값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안다는 말이오.
그러나 댁은 이 방법을 모르니,
데이터의 오차가 0%라는 전제을 검증하지도 않고서 결론을 도출하였으니..
문제풀이를 잘못하였다는거요. 이해되려나 모르겠구만.

전제가 틀렸으니 결론도 틀렸다는 말이오. 알겠소?

댁은 어디 천문공학과유? 그런과도 있나 하하.
중립사학 08/08/07 [13:44]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의 논문 결론부분은 coo2의 주장과 다르다.

논문의 결론을 인용하면...

"신라의 위치가 500년 경을 기점으로 큰 변동을 있었어야 함을 보앗다. 이 특별한 시점에 신라가 어떠한 역사적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또는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된 사료에 대한 향후 연구가 요청된다"

박창범교수는 신라가 양자강에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았다.
알겠냐?
신라의 일식관측지점이 왜 양자강 부근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향후연구"를 해달라고 하였다.
즉, 사서기록을 가지고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였다.
박교수는 그 이유를 2가지로 요약하였는데

1. 신라의 역사적 변동.
2. 삼국사기 편찬 사료를 의심.

1은 너희들이 바라는 대륙신라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고
2는 내가 말하는 측정오차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위 두 가지 중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무식하게 '일식기록을 보면 신라는 중국에 있다'고 하고 있으니,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박박 우기기만 하는 것이다.

박교수의 논문에서는 신라가 대륙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알겠냐?
너희들이 논문을 잘못이해하여 일식기록이 신라는 중국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진짜천문학박사 08/08/07 [14:40] 수정 삭제  
  공학박사라는 사람이 신라의 일식 2개가 한반도에서는 안 보인다는 것을 오차라고 말할 수 있소이까? 당신의 공학은 그렇소?
그리고 집안에서는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하나도 볼 수 없는 것도 오차입니까?
천문학에 대해 모르면 가만히 있고 그 일식분석은 수십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쳐 작성한 것이오. 오차가 있을 수 없오. 그걸 오차라고? 당신이 박교수 논문을 보기나 봤소? 박교수 논문에 오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

그리고 당신이 박사라고 칩시다. 그 좋은 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좋은 두뇌를 가지고 우리 역사 복원에 이바지해야지, 썩어빠진 식민사학을 숭상하고 민족사학을 까는데 앞장르 서요? 당신 할아버지가 이병도라도 되오?

사람은 자고로 정신이 살아야 되거늘 아무리 공학박사 받으면 뭐합니까? 그런 썩은 정신 가지고... 강단이야 자기들 밥벌이 때문에 역사왜곡 한다고 칩시다. 근데 당신은 왜 그러는거요?
따라서 당신은 공학박사라기 보다는 식민사학의 홍보 알바로 밖에 안보이고, 먹고 살 짓이 그렇게도 없소.
중립사학 08/08/07 [16:11] 수정 삭제  
  역사를 바로 세우려거든 공부좀 하거라.

공학을 한 자의 논리를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몇십년을 사학을 공부한 강단을 이긴다고 하느냐.
강단에게도 논리가 딸리면 나에게 욕하는 것처럼 욕할래?
이런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은 보면 볼수록 깡패집단같다.
논리로 못이기면 욕해대는데 참 가소롭기 짝이 없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더니..
내가 강단 알바같냐 하하. 난 강단알바아니거든.
너희들 사고구조부터 고쳐야지 우리역사가 산다.
중립사학 08/08/07 [16:18] 수정 삭제  
  내 말을 아직도 이해못하는것 같은데...넌 분명 이공계열 전공이 아니다.

박창범 교수의 계산이 오차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알겠냐?
논문의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의 측정오차가 있다는 말이다.

저기 박창범교수도 내 말에 동의를 하기때문에 결론에 썼잖어.
이해 안돼? 욕할 머리는 가지고 있어도 논문이해할 머리가 안되냐?
여기 박창범교수가 쓴 논문결론부분좀 찬찬히 읽어봐라 무슨뜻인가...

"신라의 위치가 500년 경을 기점으로 큰 변동을 있었어야 함을 보앗다. 이 특별한 시점에 신라가 어떠한 역사적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또는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된 사료에 대한 향후 연구가 요청된다"

이게 뭔말인지 모르겠냐?

1) 신라의 역사가 변화가 있던지, 아니면
2) 삼국사기가 참조한 자료에 오차가 있던지..

둘 중에 하나인데...
이에 대한 연구를 사료를 가지고 더해야지 일식기록이 양자강에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수있다는 말이다.

즉, 박창범교수는 일식기록만 가지고는 신라가 양자강에 있었다고 결론내릴수 없다는 말을 하는거다. 알겠냐? 이해되냐? 똑같은 말 두번하려니 지루하기짝이 없다. 솔직히 너 이해안되면 안된다고 말해라. 엉뚱한 소리하지말고.
천문학박사 08/08/07 [17:19] 수정 삭제  
  "논문의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의 측정오차가 있다는 말이다."라는 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드오. 일식기록의 측정오차란 있을 수 없는 말이요. 옛날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일식이 있었는지를 기록했는데 측정의 오차라니?.... 기록 자체가 없어질 수는 있어도 측정오차란 건 아예 없소이다.

박창범교수는 천문학자이지 사학자가 아니라 신라 역사가 양자강에 있다 없다고 얘기한 적은 없소이다. 단지 신라 초기의 일식기록의 최적관측지가 양자강 중류란 말은 분명 했소이다. 박교수의 일식기록논문이 오재성선생의 역사이론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오.
박교수의 논문은 역사의 진실을 과학으로 증명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엉뚱한 오차 이야기나 괘변을 늘어 놓는 것으로 보아서는 중립사학은 공학박사가 아니라 강단에서 임시로 고용한 알바생이 확실하오. 머리 좋은 공학박사가 그런 식으로 엉뚱하게 말할 수는 없지요. 오늘 글 많이 올렸는데 오늘 일당은 얼마요?
관심자 08/08/07 [22:39]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 백제, 왜의 일식관측기록을 실측자료로 인정하고 왜 이런 기록들이 이들 나라에 기록되어 있는 지 이것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 우리역사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님께서는 이 일식기록들이 누군가에 의한 실측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관심자 08/08/07 [22:53] 수정 삭제  
  님께서는 일단 천문학박사이시니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사실 머리가 나빠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밖에 못봤고 이해도 딱 그 수준입니다. 그러나 남을 고의로 강단식민빠등으로 몰아가는 님의 행동은, 모택동이 거짓말도 천번하면 진실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하등의 다름이 없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환골탈퇴하시기 바랍니다
중립사학 08/08/08 [01:15]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의 논문을 관심자님께서 읽어보시라기에 한번 읽어봤습니다.
논문에서는 일식기록의 최적관측지점이 100% 삼국의 위치라고 말하지 않더군요.

"왜 최적관측지점이 이런곳에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연구 방향은 제가 이미 앞에 썼지만 두가지로 나뉘죠.

첫째. 실제로 삼국의 위치가 최적관측지점에 있었다. 이것은 coo2가 좋아할 내용이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일식의 위치를 가지고 삼국의 위치를 비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측정값이란 항상 오차를 동반하기 때문이죠.
일식의 위치가 가리키는 지점이 측정오차인지 아니면 실제로 역사가 그렇했기 때문이 삼국의 위치가 우리가 알던것과 다르게 나타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국의 위치비정은 일식기록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과 사료를 가지고 정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연구에서도 통계를 가지고 어떤 결론을 내렸다면, 그 결론이 현상학적으로 혹은 물리화학적으로 실현가능한 결론인지 항상 따져봐야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측정값만 가지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죠.


둘째.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원본자료는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누구왕 몇년에 옮겨 적게 되었나....
이것은 일식데이터를 다시한번 검증해보자는 것이죠. 이미 제가 앞에서 인용하였지만 박창범교수도 논문의 결론부분에 이런 말을 했죠.
즉, 삼국의 위치가 우리가 알던것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일식날짜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다고 박창범교수는 생각한 것입니다.

저의 무지한 머리로 그럴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이렇군요.

1) 측정값이 아니라 다른 나라 기록을 베낀 것이다.
이 사항이 좀 민감한 것인데요. 박창범교수의 논문에서는 삼국사기 일식기록은 모든 일식값을 가지고 그것이 독자관측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증명방법으로는 "최적관측지점"이 삼국이 서로 상이하다는 논리죠. 그러나 그러한 증명방법은 모든 개개의 일식기록이 독자관측이라는 증명은 아닙니다. 즉, A라는 나라의 일식데이터가 100개이고, B라는 나라의 일식데이터가 200개인데, 100개를 가지고 최적관측지점을 계산한 위치가 200개를 가지고 최적관측지점을 계산한 위치가 다르므로 100개의 데이터는 200개의 데이터와 서로 독자적인 관측을 한 것이다라는 방법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략적으로 맞을 수는 있으나 100개의 데이터 모두 다 독자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똑같은 논리로 200개의 데이터 모두 독자적이 아니죠.) 왜냐하면 100개의 데이터는 같은 date set이 아니고 시간이 몇년 지남에 따라 서로 독립적으로 측정한 값이기 때문입니다. 좀 어렵죠? 이해되신다면 천재십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100개의 데이터 중에 98개가 독자적인 것이고 2개는 B라는 나라에서 베꼈다고 칩시다.
그리고 나서 A의 위치를 100개를 가지고 최적위치를 정하고, B의 위치를 200개를 가지고 최적위치를 정한다면 그 위치가 서로 같게 나타날까요? 다르게 나타나죠. 비록 A라는 국가에서 B나라의 데이터 중에 2개를 베꼈지만 위치는 다르게 나타날겁니다. 즉, 98개와 2개는 서로 독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98개 개개의 데이터들도 서로 독립이죠. 즉, 위 300개 일식측정값은 서로 독립적인 데이터 set이 300개라는 말입니다. 보통 독립적인 데이터 2개(A나라와 B나라)라는 오류를 범합니다. (제가 무지한 지라 저도 이거 이해하는데 2~3년 걸렸습니다)

따라서 저기 천문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라의 초기 일식기록 중에 2개가 중국에 있다하여 신라 모든 일식기록의 data set이 중국에서 측정한 것이 아니라 2개는 어디서 베꼈거나 아니면 틀렸거나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2) 달력의 차이
달력은 정권이 바뀌거나 혹은 역법계산이 맞지 않으면 바꾸죠.
제천행사가 고구려는 10월, 어디는 12월, 어디는 11월, 어디는 4월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풍습이 다른 것이 아니라 역법이 다른 것이죠. 날짜도 어디는 15일 어디는 3일 뭐 이렇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김부식이 살던 고려시대...
이시대에 과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법을 썼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김부식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법을 다 이해하여 그 날짜를 제대로 계산하였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법이 다 같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이한 역법을 갖는 나라의 일식날짜를 누구누구왕 몇일에 일식이 있었다고 옮겨적는 과정에서 분명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박창범교수는 이런 것을 알기에 삼국사기가 참고한 자료가 무엇이었는지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라고 논문의 결론부분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의 위치가 500년 경을 기점으로 큰 변동을 있었어야 함을 보앗다. 이 특별한 시점에 신라가 어떠한 역사적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또는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된 사료에 대한 향후 연구가 요청된다"

박창범교수는 일식기록의 위치가 100% 삼국의 위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박창범교수는 일식기록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사학자들이 제발좀 연구해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역사가 정말 그러했는지, 둘째로 삼국사기 일식기록이 틀린 것인지.... 이걸 사학자들이 연구해달라고 하는데, 재야학자들은 이 둘에 대한 연구는 안하고 "야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에는 삼국이 중국에 있다"라고 떠들에 대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최적관측지점) ≠ (삼국의 위치)

박창범교수의 논문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걸 잘 이해못하고 틀리게 적용한 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크크 08/08/08 [10:53] 수정 삭제  
  항상 대륙론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일식기록 일식기록... 이것의 실체가 저것이었군요.

그게 다 논문을 잘못읽고 혼자 날뛰던것이군요.
천문박사 08/08/08 [11:52] 수정 삭제  
  중립사학은 공학박사가 아니라 강단의 시간제 알바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과학의 개념이 전혀 없고 과학을 오차라는 말로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식기록을 잘못 옮겨적으면 실현률이 떨어지는 것이지 위치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박교수는 일식이 실현된 것만 가지고 계산했기 때문에 가짜 공학박사가 말하는 오차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안으로 보아 일식이 있었다는 것을 적을 뿐이지 뭘 측정한다는 겁니까? 거기에 무슨 오차가 필요합니까? 부분일식인지 개기일식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보니 부분일식도 일식으로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객관적인 자료가 되니까요.

식민강단사학은 집안이 고구려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거기서는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이거 조작 아닙니까? 사서에 집안이 고구려의 수도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사학계가 집안을 고구려 국내성으로 비정했을 뿐입니다.

박교수의 논문은 사서의 기록을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일식기록의 결과만 가지고 대륙론자들이 떠드는 것이 아니라 사서의 기록과 박교수의 과학이 일치하니 그러는 겁니다.
박교수는 사학자가 아니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의심스러워 연구 자료를 가지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두사람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각자 연구를 했습니다. 한사람은 사학 한사람은 천문학입니다. 그 전엔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서로 연구 결과가 일치했습니다. 삼국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라는 것에 합치점이 도출되었습니다. 그래서 박교수는 자신있게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 겁니다.

최적관측지가 반드시 수도일 수는 없지만, 그 수도가 일식의 관측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즉 일식이 안보이는 곳이 수도라는 엉터리 주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중립사학씨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엉뚱하게 공학박사라고 거짓말 했다가 들통나지 말고...

박교수의 논문의 해석은 간단합니다. 그리고 민족사학자들이 잘못 이해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박교수의 과학을 믿기 싫어하는 자들이 말꼬리를 붙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있을 뿐입니다.
중립사학 08/08/08 [12:49] 수정 삭제  
  머리나빠서 내 글을 이해 못하면 알아서 찌그러져 있어라.
저리 쉬운 내 글도 이해 못했으면서 박교수 논문은 읽어도 뭔소린지 모르는거 다 안다. 그러면서 무슨 논문에 대해서 평을 한다고 난리냐 하하.


내가 언제 박교수의 계산이 오차가 있다고 했냐?
일식기록이 오차가 있다고 했지? 모든 측정값에는 오차가 있는거다 알겠냐?

박교수 논문 결론이나 다시 읽어봐라.

"신라의 위치가 500년 경을 기점으로 큰 변동을 있었어야 함을 보았다. 이 특별한 시점에 신라가 어떠한 역사적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또는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된 사료에 대한 향후 연구가 요청된다"

넌 이게 뭔말인지 모르냐?

박교수는 신라의 일식기록이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을 사학자들이 연구를 더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 신라의 역사 2)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참고자료. 알겠냐? 박교수는 너희 사학자들한테 사료를 통하여 위치비정연구를 더 하라고 했고 또한 일식자료가 오차는 없는지 더 연구하라고 했는데, 너희들은 연구는 안하고 일식기록이 저기 중국이므로 신라는 중국이라고 하고 있으니 논문을 잘못이해한거다. 왜냐하면 측정값은 항상 오차가 있기 때문이지.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니 내가 강단알바라고 하지.

그리고 어디다 함부로 민족사학이라고 붙이냐? 너네가 민족사학이면 지나가던 개가 웃는다. 그냥 재야사학이라고 해라.
크크 08/08/08 [13:22] 수정 삭제  
  천문박사는 뭘 모르시나본데...
틀린 데이터를 가지고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면 결과는 당연히 틀린 결과가 나오죠.
일식기록이 틀렸다 맞았다를 증명하지도 못한체 과학적 방법을 적용해봤자죠.
중립사학이 하는 말이 이 소립니다.
천문박사 08/08/08 [13:23] 수정 삭제  
  공학박사를 사칭한 강단 알바의 지적에 대해 위 본문에서 성훈칼럼리스트가 이미 지적을 하셨네요. 고 부분만 카피를 해오면 아래와 같소이다.

(인용)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도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 이사금(尼師今) 등으로 불렀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 때 비롯되어 왕이 죽자 지증이란 시호를 처음 쓴다.

신라는 503년 이전에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왕 시절부터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대왕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륙신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양나라의 공직공도로서 백제 사신의 그림과 함께 백제를 설명하는 글에 보면,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는 문구가 있어 신라가 당시 백제의 속국(부용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서는 동신라가 원래부터 속국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지증왕 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신라세력이 커져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A.D 450년 이후의 고구려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지증왕 이전의 신라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인용 끝)

이것이 박교수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니요?
그리고 할 말의 밑천이 다 떨어지고 승질 난다고 공적인 지면에서 반말하고 똥자를 쓰면 안되지요. 그건 개인의 교양 문제로 공학박사님같은 분이 쓰는 용어가 아니지요. 따라서 중립시학은 공학박사가 아니라 강단의 발바닥이나 핥아주는 개가 확실하오?

박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라.

중립사학 08/08/08 [13:30] 수정 삭제  
  딴소리만 쭉 써놨구만.

신라가 중국땅에 있었다는 증거를 대라니깐 대체 무너소리를 해대냐.
중립사학 08/08/08 [13:37] 수정 삭제  
  1. 국호가 사로 사라 신라로 변하고 마립간 니사금 왕으로 불렸다는 것은 신라가 양자강에 있다는 증거가 안된다.

2. 503년 이전에 독립국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신라가 중국땅에 있다는 증거도 안된다.

3. 담로중에 신라가 있다는 것또한 신라가 중국땅에 있다는 증거가 안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양자강 유역 신라의 일식들은 측정오차이다...

이렇게 결론내리는거다. 알겠냐? 과학적방법이 뭔지도 모르고 주먹구구로 하니 저런 엉뚱한 소릴해대지. 넌 삼국을 중국땅에 집어넣어서 삼국을 중국역사로 만들려는 짱깨 발바닥 빨아주는 쌔빠트다. 알겠냐? 퉤퉤퉤
참고 08/08/08 [14:00] 수정 삭제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은자료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2
중립사학 08/08/08 [14:22] 수정 삭제  
  아주 재밌는 자료도 있군요.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3
중립사학 08/08/08 [14:26]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는 말하기를 신라의 일식기록이 나타나는 이유를 밝히려면
1) 역사적으로 그러했는지 사료와 유물을 통해 증명해야하거나
2) 삼국사기 일식기록을 참고한 자료에 대한 더 심도높은 조사연구
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coo2에서는 박창범교수의 위 2가지 말은 무시해버리고 그냥 신라의 일식기록이 중국땅이므로 신라는 중국에 있다고 결론내리는 뻘짓거리를 하고 있고.

세연은 coo2를 반박하기 위해 1910년 ~ 2010년의 서울 일식데이터를 가지고 그 위치를 분석했는데 아주 엉뚱한 곳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였죠.

그러나 다들 소용없는 짓인데...

그 일식데이터에 오차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그리고 그 일식데이터가 얼마나 정확한지 검토도 안해보고....
raw data를 가지고 그냥 소프트웨어를 돌렸으니 정확할리가 없죠....
다들 쓸데없는 짓을 한거죠. 다들 통계가 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프로그램만 돌리고 있으니...죽은자식 불알만지가랑 다를 바 없습니다.
천문박사 08/08/08 [15:01] 수정 삭제  
  에 신라는 양자강 중류에 있었다고 명기한 구절은 없다. 그렇다고 한반도 동남부라고 명기한 적도 없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후세인들의 몫이다.
박혁거세 편에 보면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아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일까? 중국 대륙일까?
진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동남쪽으로 왔다고 우기는 족속이 강단이다.

신라 초기 기록에 낙랑과 말갈이 무수히 나타나는데 한반도에 낙랑과 말갈이 있는지?

선덕왕 때 백제가 고구려와 합세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에서 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에게 급박한 사정을 알렸다. 육지성인 당항성을 빼았는데 왜 당과 신라의 통로가 끊어지누? 그건 당나라와 신라가 육지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소리임,

그리고 백제 패망전쟁을 보면 신라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 신라 김춘추의 직함은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우이도는 산동성을 말함이다.

고구려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와 신라가 전투를 벌이는데 당나라는 석문의 들에, 신라는 대방의 들에 진을 친다. 이 석문이 지금의 하북성 성도 석가장이고, 대방은 석문과 접한 곳이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으나 일일이 끄집어내기가 시간 걸려 번거러움.

여하튼 중립사학은 하는 행위나 글로 보아 공학박사는 분명 아니고 강단에게 용돈이나 받는 알바일 뿐이다. 그에서 침이나 뱉는 자가 박사일 수는 없다.
중립사학 08/08/08 [15:30] 수정 삭제  
  이제 확실해졌구만.
신라의 일식기록중에 양자강으로 나타나는 것은 측정오차라고 분명히 나오는구만...

* 마한의 동쪽이 진한 즉 신라이므로, 마한은 산동반도에서 하북성까지지. 그러니 진한 즉 신라는 요녕성일부와 남만주와 한반도다...
* 신라가 요녕성 근처이니 낙랑과 말갈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지사...
* 당항성이란 요녕성 서쪽 즉 마한땅이었던 곳을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내몽골 만주의 고구려와 산동 하북의 백제를 뚫고 당나라로 가려던 곳이 되는것이야. 그러니 당항성은 육지성인데 내몽골과 하북성 사이가 되지.
* 백제 패망전은 당연히 산동 하북이지. 그런데 신라는 마한의 동쪽이므로 요녕성 남만주 한반도 부근이지.
* 석문은 지금 산해관 난하부근에 있다. 대방이란 곳은 낙랑 지역이므로 요동반도 정도 되지.... 그리고 석문이란 곳은 중국에 무지 많다 알겠냐? 더군다나 사서에서는 "석문성"이라고 했지 석문이라고 안했다. 석문성은 꼭 한곳인데 석문새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곳은 산해관에 있다. 공부좀 더해라.

봐라 어디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있다고 나오냐?

말도안되게 우기지 마라.
너는 신라를 중국사로 만들려는 짱개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너는 뭐 할짓거리 없어서 재야사학인냥 거짓말하면서 더러운 짱깨 냄비짓이나 하고 있냐?
크크 08/08/08 [16:05] 수정 삭제  
  말도안되는 소리하지말고
한산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뺏고 뺏기고 했던 곳이다.
coo2너네가 주장하는데로 비정하면 한산주는 도대체가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다.
양자강에 있는 신라가 어떻게 고구려 땅을 빼앗냐 하하

동신라 서신라 소설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기를 바란다. 그건 소설이지 역사가 아니니깐. 증거도 없고 말도안되고.
중립사학 08/08/08 [16:15] 수정 삭제  
  통계란 오차가 있으므로 증거가 되지 못하는거야 알지?
다른 증거를 대보쇼

중국이 남쪽으로 신라를 침공했다는 기록이라도 있으면 대보쇼.
천문박사 08/08/08 [19:13] 수정 삭제  
  돈들여 시간들여 학문(공학)한 사람의 인성이 저 모양이라면 누가 믿겠나? 물론 공학박사가 아니겠지만 만일 공학박사였다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거여. 저런 인간이 박사가 되다니....
그리고 설사 공학박사라 머리가 좋다 하더라도 그 머릴 좋은 데 써야지, 그 좋은 머리 가지고 민족정신 파괴하는 데 쓰는지 모르겠네. 그럴바에야 아예 공부 안하는 것이 낫지.
공학박사되면 연구도 연구지만 강의도 할 것 아닌가벼. 그 정신 머리 가지고 무슨 강의를 한다고....여하튼 중립시학은 공학박사가 아니라 강단의 개이니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 마한의 동쪽이 진한 즉 신라이므로, 마한은 산동반도에서 하북성까지지. 그러니 진한 즉 신라는 요녕성일부와 남만주와 한반도다...(웃기지 마라 네 추측일 뿐이다)
* 신라가 요녕성 근처이니 낙랑과 말갈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지사...(한반도는 아니니 중립사학인듯)
* 당항성이란 요녕성 서쪽 즉 마한땅이었던 곳을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내몽골 만주의 고구려와 산동 하북의 백제를 뚫고 당나라로 가려던 곳이 되는것이야. 그러니 당항성은 육지성인데 내몽골과 하북성 사이가 되지. (만주 근처라 하니 그래도 강단 보다는 낫다)
* 백제 패망전은 당연히 산동 하북이지. 그런데 신라는 마한의 동쪽이므로 요녕성 남만주 한반도 부근이지. (무슨 궤변을...)
* 석문은 지금 산해관 난하부근에 있다. 대방이란 곳은 낙랑 지역이므로 요동반도 정도 되지.... 그리고 석문이란 곳은 중국에 무지 많다 알겠냐? 더군다나 사서에서는 "석문성"이라고 했지 석문이라고 안했다. 석문성은 꼭 한곳인데 석문새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곳은 산해관에 있다. 공부좀 더해라. (산해관 석문성은 돌문으로 된 성이고 그 석문과 당나라와 신라 전투의 석문은 다르다. 산해관 석문성은 중요하지 않아 사서 기록과 별 상관없다,. 제대로 알아라.)

당신은 공학만 하던가 아니면 더 공부해 사학만 하던가 해라. 중간에 걸쳐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즉 강단도 아니고 민족사학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있으면서 민족사학 비판이나 하고 하는 것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다.

공학박사든 강단의 알바 개든 먼저 인간이 되고 역사에대해 제대로 알고 댓글을 달기 바란다.
잘 있어라 당분간 안 들어온다, 휴가간다.


중립사학 08/08/09 [00:30] 수정 삭제  
  이제 네가 주장하는 것이 바가 틀렸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지는구나.

* 마한이 산동 하북임을 너도 인정하지? 그런데 왜 신라가 양자강이냐? 너의 주장이 틀렸다.
산동하북이 마한 백제이니 신라는 요녕과 한반도 맞지 그게 왜 추측이냐 너는 동쪽이 어딘지도 모르냐?

* 이에 대해서는 하나도 반론도 못하는 걸 보니 너의 지금까지 주장은 틀렸다.
신라가 양자강이면 말갈과 낙랑이 백제냐 ? 하하

* 신라가 양자강이면 당항성은 어디냐? 하하. 정말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는구나. 신라가 양자강이면 백제와 고구려에 가로막혀서 당항성을 차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바부야.

* 이것에 대해서는 반론하나 못하고 궤변이라 하는구만.

* 석문이 중국사서에 얼마나 많이 나오고, 지금도 석문이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안다면 석가장이 석문이라는 헛소리는 못할거다.
백제가 공격한 곳은 석문이 아니라 석문城이고 사서에 석문城은 석문塞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석문塞는 산해과에 있다고 분명하게 나와 있다.

기냥 "석문"이라는 곳을 대청일통지에서 찾아보면....직례, 영평, 순천, 선화, 존화, 봉천, 安徽綂部, 安慶府, 徽州府, 池州府, 和州, 六安州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알겠냐?
네가 찾아야 할 곳은 기냥 "석문"이 아니라 "석문성"이다 바부야.

이제 짱깨 하수인 짓 그만하거라.
재야인냥 하지만 난 네가 짱깨 하수인인 것 다 알고있다.
중립사학 08/08/09 [02:16] 수정 삭제  
  하하 나이 값좀 해라. 나이는 어디로 먹었냐.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가지고 저게 뭔짓이래. 쯧쯧.
하하하웃긴다 08/08/09 [02:40] 수정 삭제  
  아무리 봐도 논조가 비슷하군요. 왜 자기가 쓴 글의 답글을 다른 사람 아뒤로 할까요. 아닌가...
크크 08/08/09 [15:11] 수정 삭제  
  크크 아무래도 동일인인듯
공부하자 08/08/09 [15:56] 수정 삭제  
  성훈씨 스스로도 인정하듯이[붕]자는 황제격에 사용하는 것이다. 백제본국이 한반도 서남해지역이니 공주.부여에서 백제황제들의 무덤들과 사리함이 나오는 것이다.

백제창왕이 나제동맹을 파기한 신라와의 전면전에서 신라군에게 죽은 아버지 성왕과 아들의 넋을 기리기위해 사찰을 직접 창건하고 직접 사리함을 봉헌하여 사리함이 출토되기도 한 부여는 백제의 수도다. 부여정림사지5층 석탑에 [대당백제정벌]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록에 있어80%신뢰도를 자랑하는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바다건너에 위치하고 있다고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바다]를 구분못해서 [평야]니 [큰강]이니 하는 자들은 정신나간 자들이다. 중국의 백제땅은 [서백제]다..

백제본국 한반도 서남해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중국-동남아지역을 담로제도로 경영했다. 백제는 비류-온조-구태백제로 구분된다.. 고추모 세컨드 소서노 큰 아들 비류가 유리에게 고구려 왕위를 빼앗기자, 발해만 지역으로 남하하여 어하라국 건국했는데, 이것이 비류백제다. 온조세력은 배를 타고 한강이남에 토성을 쌓고 마한지역들을 복속해 나간다. 이 때 중국 동진이 온조백제를 지들 표기로[영동대장군]으로 인정하며 국교를 맺기도 하는 것이다.그래서 한강변의 풍납토성에서 중국 동진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기도 하는 것이다. 비류백제는 고구려와 전연에게 얻어 터지고 온조백제에 합류한다. 이러한 온조백제를 황해도(대방)에 건국한 구태백제가 복속하고 일본열도까지 복속하게 된다. 그리고 온조백제계와 구태백제계의 왕권쟁탈전에서 구태백제계가 승리하게 되고, 중국-동남아지역까지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 피라미드무덤양식의 기원이 되는 고인돌 중심지역인 [한반도]는 본래 요하로부터 비롯된 황하문명의 뿌리로써 고대 한국의 중심지다. 이러한 한반도지역을 고대 동이족들은 소중히 여겼으며, 단군조선연방체제의 붕괴 후 한반도로 대거 이동해 오기도 한다. 백제가 중국에서 건국되었다고 하는 자들은 마한의 위치조차 모르는 자들이다.

백제국은 마한53개국속에 들어있다..이 마한의 동쪽에 진한이 있고, 진한은 북쪽의 예=동예와 접하고 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서쪽이 바다(황해=서해)와 접해 있다는 마한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속하는 지역이다. [마]라는 것은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에서 비롯한 말이다. 정신나간 자들이 어떻게 한반도중심의 역사를 중국중심으로 옮겨놓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찬동하는 논리를 펴며 헛소리를 하는지 통탄할 일이다.
반도라면 08/08/09 [16:49] 수정 삭제  
  반도에 사는 것이 창피한가...
반도에 건국되었다는 말만 나오면 이병도 추종자니 강단의 개니....
할말 못할말 따 찌글여대는데..
저의가 무엇인가...

자신이 지금 살고있는 한반도 땅이 창피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삼국의 역사를 다 중국땅 한복판에 집어넣어 삼국역사를 중국역사로 만들고자 함인가? 아니면
중국을 부러워하고 우리역사를 챙피하게 생각하여 중국역사가 우리역사였으면 하는 자인가?
도대체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자임.
칸텡그리 08/08/11 [10:08] 수정 삭제  
  명쾌한 논리, 나주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고단위 필체...
성훈님의 모든 글은 정말로 훌륭한 글 일색이며 또한 한민족을 위한 애국적인 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글에 대해 반말을 써가며 악플을 다는 망나니들은 분명코 그 누군가로부터 돈과 이익과 지령을 받고 성훈님을 해코지하려는 인간말종들이 100% 분명함을 제 목숨을 걸고 보장합니다.
정신나간자들 08/08/11 [10:14] 수정 삭제  
  너희들 국수주의자들은 논리고 뭐고 없고
무작정 우기면 장땡이지.
그런 우기기 글이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먹힐까 생각해봐라.

더군다나 반박만 하기만 하면 "인간말종"이라는 단어를 서슴치 않게 쓰니
인간말종은 다름아닌 너희들이니라. 개 눈에는 개 밖에 안보인다는 선인들의 말이 생각나느니라.
치우 08/08/12 [02:28] 수정 삭제  
  정신나간자들/
번개처럼 빨리도 답글 달았네..
할 일 없는 무지렁이 같은 개만도 X한 넘!
쁑쌴 08/08/12 [14:14] 수정 삭제  
  이제 여긴 완전 난장판이군. 완전 역갤같다.
국수주의재야사학들이 항상 역갤을 욕하지만, 너희도 결국 그들과 같이 논리고 뭐고 없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된다.

너희들을 환빠라고 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의 이런 자세때문이다.
반론에 대해서 논리로 반박을 해야지, 그럴만한 역량이 안되면 항상 욕하고 지랄하더라.
그러니 환빠가 되는거다 알겠냐.
어이~~환빠야~~~
밝달 08/08/13 [02:52] 수정 삭제  
  식민사학자들의 특징:
왜놈, 이양인처럼 어릴 때 부터 부모와 가족간에 교미를 하고 특히 집단교미와 애인, 부부교환을 아주 잘 한다.(실제로 100% 사실임)
하얀 것을 검다고 할 정도의 도가 넘는 뻔뻔스런 거짓말을 일상화하며...
돈 한 푼에 탐이나 알지도 못하는 남을 무참히 해코지하거나 죽이기도 한다.(줄기세포)
그외 너무나도 많은 비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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