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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8/12 [16:12]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8/12 [16:12]
지금까지 (1부)에서는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의 의혹에 대해 집중 조명해 보았다. 위대한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무령대왕은 이렇듯 허망하게 부인에 의해 독살당하고 아들인 성왕에게 장중한 장례의식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타국 땅에 쓸쓸히 묻히고 만다.

계묘년(523년)에 붕어해 을사년(525년)에 묻혔으니 3년상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주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3년상 이전에 누군가 시신을 몰래 빼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셔진 무덤의 석실크기(33.5m3)도 부부 합장릉 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일개 귀족인 유주자사 진의 덕흥리 무덤(48.4m3)의 70% 수준이다. 그렇다고 당시 백제가 고구려보다 위상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투시도.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 백제대왕의 릉의 1.5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령왕릉은 부부합장릉임에도 불구하고 단칸이고, 공간도 덕흥리 고분의 70% 수준이다.
 
(2부)에서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자요 안목이 그림과 같고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모두 쏠리었다.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점령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이르러 한솔 해명을 시켜 토벌케 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좌평 백가는 바로 동성왕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동성왕을 살해할 정도면 군권이 막강한 실권자였을텐데 이상하게 무령왕에게는 맥도 추지 못하고 항복해버린다. 그리고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기록과 대조하면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삼국사기>에는 21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아들인 22대 문주왕이 뒤를 잇고, 그 다음에는 문주왕의 장남인 23대 삼근왕이 뒤를 잇는다고 되어 있다. 삼근왕이 일찍 죽자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24대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왕위계승도>
21대 개로왕 ----> 22대 문주왕 ---------> 23대 삼근왕 
                 ----> 곤지(문주의 아우)-----> 24대 동성왕 ----> 25대 무령왕

동성대왕은 501년 37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니 464년생이다. 그리고 무령왕은 523년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고 무령왕릉 지석에 씌어 있으니 461년생이다. <삼국사기>대로라면 오히려 아들인 무령왕의 나이가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3살이나 많다. 형제간이면 맞을 나이인데 부자간이라니 뭐가 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다. 왜 그럴까? 

도저히 <삼국사기>로는 이 의문점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통에 대해 설명해줄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우리의 현실은 근세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 기록이 유실되고 왜곡 조작되어 역사기록이 많지 않아, 그나마 고대사서로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이니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줄 사서도 사실 없다. 

<일본서기>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이기는 하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많은 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연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히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삼근왕이 죽자 당시 왜에 있던 곤지의 5왕자 중 둘째 왕자인 말다(末多)가 젊고 총명함으로 백제의 왕(동성왕)이 되어 왜로부터 귀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 모대가 동성왕이 된다는 기록뿐이다. 여하튼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큰 내용은 같다.

▲   일본의 아스카(飛鳥) 마을에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지금도 아스카네 신사에서는 해마다 곤지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은 곤지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는 장면.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희한한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백제신찬을 인용해 다름 아닌 무령왕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다. “25세 무열천황 4년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인(島人 섬사람)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휘는 사마(斯麻)왕이고,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도읍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의 바다 속에 주도(主島)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복형이라 함은 미상이다.“라는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과연 맞을까? <일본서기>에 기록된 1대 천무왕이 실제로는 15대 응신왕이고, 신공왕후의 기록이 120년이나 올라가 있는 등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서이다. <일본서기>말고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참고로 일본에서는 무령왕의 모친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오는 중에 각라도(各羅島)에서 무령왕을 낳았다하여, 지금도 후쿠오카 북쪽의 가당도(加唐島)에 무령왕 유적지를 만들어 놓았으나 사실 무령왕과 일본열도의 가카라시마(加唐島)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각라도나 가당도나 다같이 가카라시마로 발음된다.

일본은 가당도를 각라도라 하며 무령왕의 유적지를 허위로 만든 것이다. 그 이유는 백제를 반도사관으로 묶어 한반도에 있다고 해야 왜의 주무대가 일본열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일본의 치밀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주산군도 앞바다 어딘가에 각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   일본 큐슈 북부 가카라시마(加唐島)에 있는 무령왕의 탄생지(?)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사서에 보면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북조시대의 남조였던 송나라의 사서인 송서(宋書)의 기록으로, 478년 왜왕 무(武)가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엄청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귀중한 내용이 들어있다. 다음은 원광대 소진철교수의 저서 <금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에서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썼다. 

“왜왕 무는 이 상표문에서 자신의 왜국을 백제의 봉국(封國 제후)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빛나는 군사적 업적을 거두어 무려 200개가 넘는 주변의 대소국들을 평정해 지금은 그 강역을 크게 넓혀 왕도가 융성하고 크다고 했다. (중략)

그는 망해가는 백제를 위해 고구려의 침략에 결연히 대처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제는 때가 와서 다시 병갑(兵甲 전쟁준비)을 가다듬고 망부의 유지에 따라 적의 강토를 무찌르겠으니 폐하의 큰 은덕을 간청하는 바라 했다. (이하 생략)“

여기서의 왜왕 무를 일본학자들은 자신들의 천황인 웅략(雄略)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왜왕 무는 웅략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 왜왕 무는 누구일까? 왜왕 무는 다름아닌 소년 시절의 무령대왕이었던 것이다. 왜왕 무가 상표문을 올렸을 때가 478년이고, 무령왕 지석에 따르면 무령대왕은 461년생이니 왜왕 무가 17살 때이다.

그리고 위 상표문의 내용인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의 부형(父兄)은 475년 겨울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에게 7일간의 공격 끝에 한성이 함락당하고 붙잡혀 처형당한 백제의 개로왕과 왕자들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표문으로 인해 후에 무령왕이 되는 왜왕 무는 개로왕의 친아들임이 밝혀진다. 이 무령왕의 츨자(出自)에 대해서만은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곤지는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리고 왜로 갔을까?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왜왕(倭王)에 부임하기 위해 왜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곤지는 천황이 아니라 백제에서 파견한 제후인 왜왕으로 보아야 한다. 소년 무도 나중에 왜왕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일본 사학계는 명문에도 없는 칠지도 헌상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성립이 불가능한 웅략천황을 왜왕 무에 비정하는 등 천황(天皇)은 바로 왜왕(倭王)과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고대사의 실체를 크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천황’과 ‘왜왕’은 전혀 그 계보를 달리하는 전혀 다른 실체라는 것을 이 상표문이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왜왕 무는 475년 자신의 부형이 갑자기 죽었다고 했는데,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웅략천황의 기록으로는 이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다. 웅략천황의 부왕인 <왜왕 제>라고 하는 인공천황은 이 때 이미 서거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웅략천황과 왜왕 무(武)는 전혀 다른 실체로서 왜왕 무의 부왕은 475년 겨울 아차성에서 비명에 쓰러진 백제 개로왕의 태자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기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왕 무의 아버지인 백제의 개로왕은 어디서 어떻게 비명에 쓰러졌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 무령왕릉을 처녀분이라 발표했지만 미리 사람이 침입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신발이 옮겨진 것은 귀신이 움직인걸까? 그래서 미리 누군가가 몰래 지석을 갖다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개로왕 21년(475년) 가을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구려가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빼앗고 옮기어 남성을 공격하니,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쳐 나갔는데 고구려 장군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 조금 있다가 왕의 면상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낱낱이 말한 다음 꽁꽁 묶어 아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이렇듯 치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이 장면이 왜왕 무(무령왕)가 말한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란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로왕은 왜 갑자기 치욕의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개로왕은 바둑을 아주 좋아하는 고수였다. 이를 갈파한 고구려는 바둑의 고수인 도림이라는 승려를 간첩으로 파견한다. 개로왕과 바둑을 둠으로서 가까워진 도림은 왕에게 나라를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왕은 국민을 모두 동원시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궁실.누각.대사를 마련하였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비의 뼈를 장사하고,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궁곤하여 나라의 위태함이 알(卵)을 포개놓은 것보다 더 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도림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해 미리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켜 놓은 것이다.

여기서 개로왕이 쌓은 하수의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한성(漢城)을 한반도 서울로 보기 때문에, 하수를 한강으로 숭산을 현재 팔당대교 부근의 검단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백제를 한반도 내에 가두려는 매국사학계의 엉터리 역사비정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했으니 한성에는 연와의 성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마련하였다 하였으니 그 흔적이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궁실.누각.대사는 없어졌다 해도  연와의 성은 존재해야 백제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서울 근처에는 "연토축성" 즉 "연와의 성"이 없고 아니 한반도에도 없다. 또한 한반도에는 그런 지명조차 없다. 현 한강 지역에는 제방(堤防)의 흔적도 사성(蛇城)이나 숭산(崇山)이란 지명도 없다.

연토축성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 역사의 사실적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데, 한반도에는 벽돌로 된 성이 없으나 漢水로 불리었던 황하 유역에는 벽돌의 성이 많이 있다. 연토축성은 돌이 귀한 지역이거나 벽돌의 사용이 일반화된 지역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황하지역은 돌보다는 벽돌의 사용 흔적이 더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로 보아서 벽돌의 성이 없는 한반도보다는 지명과 일치하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 서울에서 성을 쌓는데 흙을 구워 즉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주변의 산에 돌이 무수히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서울의 성터는 모두 돌로 된 성이다. 따라서 우선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에서 한성은 돌이 귀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말하자면, 개로왕이 제방을 쌓은 하수(河水)는 황하(黃河)를 말함이고, 숭산은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인 것이다. 개로왕의 제방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중국군사지도에 그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역시 그 제방의 서쪽 끝은 정확히 하남성 숭산의 북에서 끝나고 있다.
 

▲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황하변에 있다. 동단은 사성이요 서단은 숭산의 북이다.
▲   개로왕의 제방이 표시되어 있는 중국군사지도. 제방이 기차 철로 식으로 표시되어 있다.
 
게다가 황하유역에는 연와성이 많이 있다.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는 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황토를 구워 벽돌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참고로 사성은 정확히 어디인지 비정할 수 없다.

그리고 한강변에는 굳이 제방을 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한강은 가끔 범람할 수는 있어도 물줄기가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강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흐르기 때문에 잘 범람하지도 않는다. 개로왕은 십수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한강의 범람 때문에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며 한강에 제방을 쌓았다고 보는지....

개로왕이 온 국력을 기울여 하수변에 제방공사를 한 것은 바로 황하의 물줄기가 수시로 바뀌면서 자주 범람하기 때문이다. 황하는 상류에서 산서성의 계곡을 흘러오다가 낙양과 정주의 평야 지대를 지나면서는 어디로 물줄기가 바뀔지 모른다. 상류인 산악지대에 비가 많이 오면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는 그야말로 물바다로 변한다. 

▲   산악지대에서 내려온 황하는 평야지대에서 수시로 물줄기가 바뀐다. 그래서 개로왕이 온 국력을 기울여 제방을 쌓은 것이다.  당시 황하의 흐름은 현재보다 북쪽으로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개로왕은 국력을 기울여 제방을 쌓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국력의 저하를 가져와 고구려 장수왕이 쳐내려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것이다. 서울의 한강변에 제방을 쌓는다고 백제의 국력이 저하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강과 황화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강이다. 

물론 아직도 1500년 전의 흔적이나 지명이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와 묻힌 곳인 안휘성 몽성 지역에 하수(河水) 또는 한수(漢水)로 불리었던 황하가 있고, 숭산이 있고 제방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로왕때 연토축성의 흔적이 서울 지역에는 없다. 한반도에는 연토축성을 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결국 개로왕의 제방이 우리에게 준 역사적 사실은 바로 백제가 중국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의 황하변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개로왕이 서울의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마 개로왕은 한반도에 와본 적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게다가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몽촌 토성내의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석촌 몽촌토성의 고분군의 형태는 백제의 명문 기록이 없고 집안 지역의 고구려 고분과 외형이 같다. 결국  이 지역은 고구려 지역임을 나타내고, 다른 피라밋 역시 고구려 고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서울 남쪽인 중원 고구려비, 경주황남대총의 영락연호 잔, 창녕 진흥왕비에서 비리성은 서울 지역이 고구려 일부임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백제라는 명문도 없는 것을 백제 고분으로 규정해서야 되겠는가? 매국 식민사학계여! 이제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  식민사학계가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한 고구려식 무덤양식인 피라밋. 왜 공주의 무령왕릉과 양식이 다른지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에 두가지 고분 양식이 있을 수 있나?

동성대왕 시절의 백제 강역

무령왕은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25대 왕으로 등극한다. 바로 직전왕인 동성대왕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은 무령대왕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를 자연스레 알 수 있는 것이다.

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중국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물리고 물어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대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즉 그것은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북위(北魏 386~534)이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쪽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또 북쪽에 북위가 건립되었을 때 남쪽에는 남제(南齊 479~502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우리는 북위의 왜 백제를 침범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39년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자신의 영토 앞에 있는 백제가 무척 눈에 가시 같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북위가 백제를 공격해 왔다.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군왕답게 이를 과감히 맞아 격퇴하였다. 이 백제군은 백제군과 남제군(南齊軍)의 연합군이었다.

자치통감 권136 영명(永明) 6년(488년)조의 기록을 보면,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여기서 요서, 진평 2군의 백제 땅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북위가 공격해온 곳이 바로 하북성내 백제 강역이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위서 권7하 고조기(高祖紀)에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세조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라는 기록이 있고,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대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과 북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였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동성대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하였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문서 속에 포함되어 남제서에 채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인 고달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인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장군 겸 참군인 회매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대방(帶方)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백제건국의 고토인 대방고지를 말한다.
광릉(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북애(北岸) 부근 을 말한다.
광양(廣陽)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상곡(上谷)지방이다.
청하(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 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    동성대왕 시 백제의 강역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다 차지했다.  북위는 산속에서 내려와 동부평야지대를 차지하려고 5차례나 백제와 전쟁을 벌렸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백제-남제의 연합군에 패전한 북위는,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 490년(경오)의 전쟁 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도 묘사되어 있다.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강시단야).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 북경부근)에서 백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긴다(493년). 전열을 정비한 북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북위군은 개전 2달 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 등 결국 북위군은 총퇴각을 하게 된다.

그 뒤에도 태화 21년(497년, 동성대왕 19년)  6월 또 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 4월에도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북위는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后之私府 便可損半 六宮嬪御 五服男女 常恤恒供 亦令減半 在戎之親 三分省一’]”

백제의 강역이었던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이고, 북위의 주무대인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 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이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평야지대를 얻고자 하였으나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의 5차례의 큰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동성대왕의 주무대는 과연 어디였을까? 식민사학계는 동성대왕에 대해서는 이상스럽게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성대왕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사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면서도 일부에서는 계속 동성대왕 당시에 백제는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건너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북위는 선비족으로 기마병이 주력부대였다. 식민사학계는 이런 기병들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한반도에 와서 백제와 전쟁을 했다는 거짓말을 국민더러 믿으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북위가 한반도에 올 이유가 없고, 기병이라 수군이 없어 바다건너 올 수도 없다. 그런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치룬 곳은 어디인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아이큐가 안 좋은 사람도 위의 글 몇 줄만 읽어봐도 북위와 백제 동성대왕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난 전쟁인지 쉽게 알 수 있건만, 유독 식민사학자들만 모르고 있으니 그들의 아이큐가 백치 수준인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척하는 건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기자가 살던 땅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내려와 한을 세우고 삼한이 발전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발전한다. 이 삼국이 어떻게 한반도에 있었단 말인가!!!

무령대왕의 주무대는 어디인가?

무령대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쌓은 제방이 중국 대륙의 황하변에 있다. 그리고 바로 전왕인 동성대왕의 전쟁터가 중국 대륙에 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무령대왕의 주무대는 당연히 대륙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느닷없이 무령왕릉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다보니 이상한 일 아닌가? 심지어 민족사학계는 무령왕릉이 가짜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으며,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을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굳히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한다.

무령왕릉의 지석은 분명 다시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령왕 죽음의 비밀을 밝혀준 남당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략/사초는 새로운 각도에서 참조되어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무령왕릉의 의문을 풀어줄 유일한 자료는 남당의 고구려 사략/사초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서는 대륙에서 활동하던 대왕의 무덤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 중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발굴된 왕릉이다.

마침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작인 고구려 사초/사략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다. 특히 광복 63주기 광복절인 2008년 8월 15일을 기해 세상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참에 역사 광복이 조만간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역사21 08/08/12 [17:25] 수정 삭제  
  성훈이란 이분, 정말 안타깝습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저지른 역사왜곡만 해도 지겨운데 이분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역사왜곡은 정말 식민사학자들을 무색케 하군요.
이런 분들 때문에 중국에 혐한감정이 번져나가는 겁니다.
중국이 우리땅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한반도가 그렇게도 싫습니까?
역사왜곡을 중단하십시오.
중립사학 08/08/12 [17:34] 수정 삭제  
  한성이 어떻게 석가장 근처냐.

역사를 제대로 봐라.

한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빼앗은 지역이다.


네가 말하기를 "신라는 양자강 근처다"라고 했지?
그러면 백제남쪽의 신라가 백제 북쪽의 석가장을 어떻게 공격하냐?
그때에 비행기라도 있어서, 백제 남쪽에서 븅~ 날라서 백제 북쪽을 공격한거냐 하하

이건 역사판타지소설이다.
지오 08/08/13 [00:14] 수정 삭제  
  그만 꼬투리 잡아라.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 없었다고 위글에 나오던 이 십장생 들아..
친일하며 나라팔아 먹은 니들 조상의죄, 니들의 죄.. 용서받을길 없는 불쌍한 놈들. 살기위해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가 정의를 찾고, 기를 펴는게 니들에겐 죽음의 신호겟지.. 이해한다. 그심정.. 그러나 친일파 니들은 끝까지 추적해 뿌리를 뽑고.. 비참한 끝을 니들 새끼들까지 경험하게 될것이다.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다.
mimesis 08/08/13 [00:20] 수정 삭제  
  소중화의 단어 뜻도 잘 모르는 사람들같군요. 남제서와 동성대왕 설명 제대로 하는 사람 못봤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으면서 뭐하는 짓들인지...???
중립사학 08/08/13 [01:17] 수정 삭제  
  제가 왜 소중화의 뜻을 모른다는거죠?
님이 잘 이해 못하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남제서와 동성대왕이란 무엇을 말하는건가요?
그곳에 백제의 한성이 석가장이라고 나오던가요?

한성은 漢水에 있었던 성이고 고대의 북한산 근처에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고구려는 남평양이라고 하였죠.
이후에 신라가 당나라와 교통하기 위하여 한산주를 빼앗습니다.
즉, 한산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접하는 곳에 있어야합니다.
대게 요녕성이나 난하 근처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한산주에 즉 한주에 부소갑이 있습니다.
즉 한산주에 부소량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려사에 보면 부소량의 좌소를 따라 아사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가점하층문화와 홍산문화가 바로 고조선과 신시의 도읍이죠.
따라서 한산주는 홍산과 하가점 문화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여기가 어딘가요?
서납목륜하와 대릉하 부근이죠.
즉, 한산주가 서납목륜하와 대릉하 부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훈이라는 자는 이런 고대 문명과의 연결도 짓지 못한체 그저 석가장의 옛이름이 석문이니 뭐니 하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지리지에보면
고구려 남쪽 경계를 빼앗아서 서쪽으로부터 한주 삭주 명주라 하였다고 나오죠.
한주가 서납목륜하무근이므로 삭주는 대게 길림 근처가 될 것이고 명주는 연해주 정도가 될 것입니다.
삭주는 고구려 우수주입니다. 한자로 牛首州 이렇게 쓰죠.
"우수하" 이 강은 속말수라고 불렸던 현재의 송화강입니다.
위치가 딱들어맞죠.

그런데 한주를 저기 석가장에다가 놓으면 삭주가 어딘가요?
우수하가 어딥니까?
앞뒤가 안맞죠.


성훈의 글은 완전 판타지 소설입니다.
이런 글에 현혹되어 우리 역사를 망치지 맙시다.
중립사학 08/08/13 [01:44] 수정 삭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가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 문명이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자기들 것이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설사 성훈이의 글이 정설이 되어 백제가 저곳에 있다고 인정받았다칩시다.
그렇다면 중국은 홍산과 하가점문화는 백제의 동북이므로 말갈족 문화 옛 숙신과 읍루의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지리비정을 저리하여 남는게 뭔가요?
땅덩이만 바보같이 커지고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미친짓이죠.

우리역사의 중심지였던 한산주... 고구려에서는 그래서 國原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소량 -> 한산주 -> 한주 -> 송악 -> (한양, 확실하지 않음)"

로 이어지는 곳이 바로 하가점문화와 홍산문화 지대입니다.

제 주장이 이렇게 고대 문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강단의 첩자니 뭐니 몰아부치는 자야말로 홍산과 하가점 문명을 중국에 떠 넘기려는 중국의 첩자입니다.
중립사학 08/08/13 [05:59] 수정 삭제  
  * 욱리하가 어디냐?
돌을 취한 욱리하는 지금도 보이는데 난하 지류인 武烈河니라. 지나인들 발음으로 "wulie(우리에)"하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열수라 하는 곳이니라.




가장 심한 왜곡은 이거니라...



* 성훈아... 삼국사기에 河水는 없느니라
이제 왜곡도 모자라서 없는 것 까지 만들어내는구나 하하

여기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네가 인용한 구절이 보인다.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취하여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장사하고 강(河)을 따라(緣) 방죽을(堰) 세웠는데(樹), 사성 동쪽에서부터 숭산의 북쪽까지 이르렀다.

여기 어디 河水가 나오냐 하하.
河를 河水로 바꾸어 소설을 지어내는구나.
삼국사기 河가 河水면 이건 어떻게 해석되냐

平壤河水血色

평양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위 구절을 보고 평양이 황하에 있다고 주잘할래? 하하

정신차려라.
강호사학 08/08/13 [10:42] 수정 삭제  
  1) 역사21은 식민강단사학의 이론을 전파하는 시궁창같은 싸이트입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좋다고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신나간 매국노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2) 중립사학은 차라리 엉터리 사학으로 이름을 바꿔라
중립사학이란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의 중간이란 말인데, 그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님의 이론은 민족사학하고는 확연히 다른 이론이고, 강단사학의 이론을 추종하면서 나름대로 색다른 이론을 내고 있습니다만, 그 이론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엉터리 이론입니다. 만일 님의 이론이 맞다면 님의 글을 받아주는 언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님의 글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님의 이론은 혼자만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엉터리란 말입니다.

3) 홍산문화는 우리의 배달국 환국의 문화입니다.
사학계는 단군조선을 국가가 아닌 신화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홍산문화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거 단군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배달국 환국의 유물입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그 나라들입니다.
중국사학계는 홍산문명이 자기네 유적이 아니라는 것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가 기자조선 이전에는 어떠한 국가도 없었다고 하니 우리 것으로 가져올 명분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사학계가 나라를 말아 먹을 매국식민사학계라는 겁니다.

중립사학 아니 엉터리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되찾겠다는 성훈씨의 글에 말도 안되는 시비나 걸고 하니 말입니다. 식민사학을 이 땅에서 쫓아내기 전에 방해가 되는 엉터리사학부터 쫓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아리송역사 08/08/13 [11:54] 수정 삭제  
  상대할 가치가 없군요..
그렇게 몇글자로만 성훈님의 글에 시비나 걸게 아니라..
성훈님처럼 증거를 내보여보십시오!!
물론 성훈님의 글이 100%로 맞는지 안맞는지는 확실하게
잘몰르지만.. 서로그렇게 으르렁되며 싸우?는 것보다..
좀더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찾고 같이 공부해 가는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군요..
중립사학 08/08/13 [11:56] 수정 삭제  
  무식한 재야사학은 자신들이 논리가 딸릴때 항상 하는 짓은 "남을 매국노라고 욕하는 것"이다.
그렇게 욕하는 것은 DC역갤에서나 하는 짓인데, 이제 너희들도 그것을 따라하려느냐....
너희들이 이렇게 논리도 뭐고 없고 무대포로 나오기에 환빠라고 불리는 것이다. 河가 어찌 다 황하가 되느냐? 아래 두가지에 대해서 반론을 하거라.


1) 지금 내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삼국사기 河가 전부다 황하를 가리키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성훈의 이론은 개로왕조에 나오는 河를 河水 즉 황하라고 한문을 잘못해석하는데서 출발하는데...

그렇다면

平壤河水血色
여기에 나오는 하수도 황하냐?
그렇다면 평양도 황하에 있다는 것이냐?

2)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문화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하가점하층문화대이고...
그 바로 남쪽이 백제다.
왜냐하면 백제는 북쪽으로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고 사서에 나온다.
그리고 백제의 가장 북쪽땅은 한산주였다.
따라서 한산주는 하가점하층문화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훈은 백제의 한산주를 하가점하층문화대에서 무지 멀리떨어진 저기 석가장에 가져다가 놓았다.
이는 성훈이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문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한산주는 신라 진흥왕때에 한주가 되는데...
대체 신라가 어디에 위치하였기에 저기 석가장을 쳐들어가느냐?
국수주의사학의 논리대로 동신라는 저기 한반도에 있으니 쳐들어 올 수도 없고..., 서신라는 양자강 부근이니 비행기가 없는 이상 석가장을 쳐들어 올 수 없다.
너희 강역론으로는 절대로 석가장을 신라가 쳐들어 올 수 없는 지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석가장이 한산주라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괜히 논점을 흐트리는 이상한 소리를 해대지 말고...
반론을 하려거든 기록을 중심으로 반론을 하거라.
강호사학 08/08/13 [12:30] 수정 삭제  
  여러분
엉터리사학이 평양 = 황하냐? 라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 밑의 얘기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토론이 될만한 상대여야 토론을 하던가 말던가 하지요. 순 엉터리 이론 가지고 괘변만 늘어 놓으니 내게 엉터리사학이라고 핀잔이나 듣지....
중립사학 08/08/13 [14:05] 수정 삭제  
  1) 성훈이가 말하기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조에 있는 구절 중에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위 구절의 河를 황하라고 성훈이가 그런다.

대체로 書經을 보면 河는 대부분 황하니라...
그런데 성훈은 삼국사기 河도 황하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반론하기를

平壤河水血色

여기의 河水도 황하냐고 물은거다.
이해되냐?


2) 그 밑의 이야기 한주 한산주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너는 내공이 부족하니...

삼국사기를 10번 이상 정독하고 나서 한산주가 어딘지 연구를 해 본후 다시 오너라. 그러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것이니라.
지리지만 좀 보더라도 그곳이 어딘지 이해되련만, 넌 삼국사기 지리지를 한번도 안읽어봤구나.




그러니...
머리가 딸리면 토론에 참여하지 마라.
너같이 머리 나쁜애 이해시키기에는 내가 참 바쁜 사람이니라.
천문박사 08/08/13 [16:26] 수정 삭제  
  중립시학은 엉터리시학으로 자칭 공박박사를 사칭하는 강당사학계의 발비딕을 핧는 개입니다. 이 사람에게 이병도 얘기만 하면 열을 잘 냅니다. 아마 이병도와 먼 친척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강단에게 이런 일자리(알바)라도 얻어 먹고살고 있겠지요.

중립사학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강호사학님이 말하신 엉터리사학이 딱 맞는 말입니다. 위의 댓글을 읽어봐도 가짜 공학박사는 사학 이론에 대해서는 엉터리임이 드러납니다.
중립사학 08/08/13 [16:34] 수정 삭제  
  꼭 실력없는 것들이 자신이 실력없는 것이 드러날까봐 남을 욕하더라.
그게 너희들이 항상 갖는 태도지.
그러니 환빠라고 욕먹지.

삼국사기 河가 어떻게 황하가 되오... ?
河는 그냥 일반명사 강이라는 뜻이오
백제를 그렇게 중국에 주고싶소?
이런 엉터리무당소설을 역사라고 할 수 있소. 하하.

반론은 못하고 욕만하니...
이것은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외다.
반론을 못하면 내가 맞고 당신은 틀린 것이오
성훈 칼럼리스트 08/08/13 [17:23] 수정 삭제  
  중립사학님, 천문박사님, 강호사학님
이곳은 여러분의 개인 카페가 아니라, 만인이 보고 있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이곳 댓글은 설사 가명을 써도 된다고 하지만 비방의 도가 지나친 것 같아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하나, 남을 비방하고 함부로 욕하는 등 비신사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자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가급적 실명을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론 논쟁이 아닌 시비걸이로 필자의 글을 공격하는 것도 삼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론논쟁은 자신의 실명을 걸고 정정당당히 합시다. 중립사학님처럼 뒤에 숨어서 그러지말고.....
역사21 08/08/13 [17:34] 수정 삭제  
  나머지는 인신공격 밖에 모르시군요.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식민사학이군요.
중국에 3국이 있으면 민족사학이고 한반도에 신라백제가 있었으면 식민사학인가요?
별 거지같은 소리 다 듣겠네.
식민사학은 바로 성훈 같은 분입니다.

한국사를 말살하려는 중국인들의 망동에 적극 협조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도대체 공부는 하기는 하는 겁니까?
정용석, 박창범 같은 후루꾸들의 말에 넘어가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거 뭐 중국인들이 모여서 신라, 백제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 난리를 치고 있군요.
그런데
멋도 모르고 이에 부화내동하는 사람들...
제발 중립사학님 같은 논리라도 좀 갖추세요.
강호사학 08/08/13 [18:53] 수정 삭제  
  역사21은 식민강단사학의 이론을 전파하는 시궁창같은 싸이트입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좋다고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신나간 매국노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중립사학 08/08/14 [00:43] 수정 삭제  
  하하
웃기는 말이지만 내 이름이 '중립'입니다.

그리고 성훈씨. 참 이상하군요.
왜 토론하는데 실명을 걸고 해야하나요 하하.
가명쓰면 토론안됩니까? 그리고 난 숨어서 한적 없습니다.

제가 이미 써놓은 河=황하 그리고 한산주에 대해서나 반론하세요.

반론없으면 제가 맞고 당신은 틀린 것입니다.
중립사학 08/08/14 [01:34] 수정 삭제  
  누누히 말하지만 아래 구절 해석이 틀렸습니다.

緣河樹堰
하천을 따라 방죽을 쌓았다

여기서 河가 어찌 하수 즉 황하가 됩니까?
상서에 河가 황하로 나온다고 河며는 다 황하입니까?

그럼 아래 삼국사기 河水도 황하입니까? 아래 구절은 성훈이 제시한 河보다도 더 정확하게 河水라고 합니다.

平壤河水血色
평양의 河水가 핏빛으로 변했다.

그럼 평양도 황하에 있군요. 하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역사21 08/08/14 [01:48] 수정 삭제  
  중국에 우리 역사를 쳐 넘길려는 이 엉터리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고는 민족사학?
민족사학이 나라팔아먹는 사학인가?
한 사람에게 못이겨 논리적으로 대꾸하는 사람 하나 없네.
참 처량하다.
실력이 없으니 당연하기도 하지만...
중립사학 08/08/14 [01:50] 수정 삭제  
  세계 사학의 대세를 보쇼.
속지주의 사관이 대세요.

즉, 현재 자신의 영토에 든 역사는 혈통을 막론하고 다 자국의 역사로 본다는 것이오.

그래서 짱깨들은 뒤에서 무식한 재야인사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오.

"백제도 중국땅에 있고 신라도 중국땅에 있다고 해라~~, 그럼 너네 역사도 찬란해지고 좋잖니?" 라고...

헤헤 그러나 웬걸...
백제의 영토비정을 저렇게 완전히 중국땅에 하는 날 부터 백제는 중국역사가 되오.
순진한 재야사학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다 저쪽 서쪽땅에 넘겨보쇼... 머지 않아 고대사를 다 넘겨줄 것이오....


그리고 미치겠네...

광릉태수 성향태수... 이게 뭔줄 아시오?
중국의 관리들이요.
그런데 중국관리를 임명한 곳에다가 백제의 수도를 떡하니 가져다 놨으니...
백제를 중국사로 만들려는 속임수에 넘거간 것이외다 알겠소?

태수는 태수이고 백제임금은 백제임금이오.
백제임금은 한반도에서 저쪽 중국동쪽땅을 식민지로 만든것이오.
그러자 지나왕들이 어쩔수없이 이름뿐인 지나관료인 '태수'라고 기록한 것 뿐이오.

역사해석이 이렇게 되는 것인데...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한성을 태수임명된 자리에다 놓으니...
이런 무식한 재야사학이 자꾸 저런 말도안되는 것을 주장한다면
백제사가 중국사될 날도 멀지 않소이다.
아리송역사 08/08/14 [10:22] 수정 삭제  
  (1) 사서에 나오는 백제 인구의 변화

신 라 : 18만호 (수도만) (삼국유사)

백 제 : 76만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 려 : 210만명 (송사 : 백제멸망 600여년 후 약 35만호)

조 선 : (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 태조 6년 (1406년 : 백제패망 740년 후) : 153,404호 (370,365명 : 한성제외)
- 중종14년 (1519년 : 백제패망 860년 후) : 754,146호 (3,745,481명)
- 영조 8년 (1732년 : 백제패망 1,100년 후) : 1,713,849호 (7,273,446명)

* 백제 패망 730 여년 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
- 경기 + 충청 +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 48,993호

(2). 분석

- 백제(4~5백만) > 고려(210만) > 조선 초(37만-한양제외) : 백제가 조선의 약 10배

- 백제(76만호) > 경기 + 충청 + 전라도 (700여년 후 5.6만호) : 백제가 13.5배

- 신라 수도 > 경상도 (700여년 후) : 신라 수도가 경상도 전체의 약4배

(3). 결론

-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백제의 영역 > 고려의 영역, 고려는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이사료들을 봤을때 백제의인구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보다 어떻게 인구가 더 많을수가 있을까요??
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중립사학님께서.. 좀 설명좀 해주
시겠어요?? 단지 궁금해서 물어보는것입니다..
지나가다. 08/08/14 [10:26] 수정 삭제  
  중립사학님 역사를 도둑질 당할까봐 진실의 역사를 숨겨야 한다는것인가요..?
오히려 그런 생각이 역사를 도둑질 당하기 딱 좋은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리송역사 08/08/14 [10:35] 수정 삭제  
  백제 8대 성씨가 한국에는 국,진,연 3개만 있는데 중국엔 8개가 있다는데..
여기에대해서 질문드립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가 100% 완벽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아! 그러니까 한반도 백제를 외치고 계신거구요??
아니면 위에님 처럼 역사를 도둑질 당할까봐..진실을 은폐하시려고하시는
거에요?? 님께서 그렇게 지키려고 동굴속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이웃나라에서는
점점더 동굴안쪽으로 서로 쳐들어오려고 압박하고있지 않습니까?
동굴밖으로 나와 서로 맞는 부분은 인정하고 틀린부분이 있으면 고치고..
여기있는 모두들 엘리트 여러분이 실텐데.. 왜 이런 의미 없는 시간만 소비하는 논쟁을 하시는지..제가 중립사학님께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건 성훈님 처럼 사료를 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게 아닌 그냥 딴지나 거는.. 욕도 하시는거 같고 말투도 상당히 거칠으신 너무 감정적이신거 같기도 하고..
아무리 인터넷 상이라지만..대한민국을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그런 태도부터
바꾸시는게 어떠하실지 ...
이건 좀 아닌거 같습니다..이게 맞는거 같습니다.. 네??
논점에서 벗어나긴했지만.. 한편으론 죄송한 말씀 드리고요..
중립사학님께서..이런 생각들을 못하게 확실히 못박을 사료 증거를 보여주실수 있으겠습니까??
중립사학 08/08/14 [14:05] 수정 삭제  
  1) 전 백제 "초기" 영토가 요동반도에서 전라도까지이고...
그후 중국땅 동쪽을 침략하여 하북에서 복건성까지 차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강역을따지자면 내가 주장하는 것이 성훈보다 더 큽니다.
그러니 아리송역사가 질문한 인구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답이 되지요.

백제의 초기 강역이 한반도라고 식민사학이니 뭐니 하는 자는 정신상태부터 뜯어고쳐야죠.

2) 백제성씨가 중국에 있다?
증거를 대세요.
姓을 사용하는 漢字가 같다고 그사람 조상이 백제사람이라는 증거를 대시죠.
그사람들 족보책에 "우리선조는 백제인이다"라고 나온 것을 대세요.

님의 주장은 이런오류가 있는데...예를 들어
李(Lee)씨는 중국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류가 중국이나 유럽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제가 주장하는 백제영토는 한반도 만이 아니므로 백제의 성씨중 일부가 중국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죠.


성훈의 주장과 같은 하시려면 백제 왕족의 성씨인 부여씨가 중국에 있다는 증거를 보이시죠.
다른 성씨야 얼마든지 남아 있을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제가 중국땅을 침략하여 영토로 삼았으니까요.

더 안타까운것은....님과 같은 성씨주장은 백제역사를 중국역사로 만든다는데 한몫한다는것입니다.
백제의 절반 이상의 성씨가 중국에 있다고 하면 백제역사는 중국역사지 더이상 우리역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사학의 주류는 속지주의 사관이기때문이고 중국은 다민족국가를 표방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멍청한 재야사학자들이 땅떵이만 크면 좋은줄알고 삼국을 중국땅에 넣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런 재야의 주장은 고구려에 이어 백제까지 중국역사에 넣으려고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임을 깨달으시죠.

이런말을 하면 어떤이는 "빌어먹을 속지주의사관"이라고 합니다. 속지주의 사관은 틀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계가 어디 그렇습니까? 힘이 지배하는 것이 세계입니다. 미국도 속지주의 사관을 표방하므로 인디언역사도 미국역사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볼때 말도안되지만 세계의 대세입니다. 약소국인 우리가 속지주의사관은 틀렸다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나라가 속지주의사관을 표방하면 모든나라가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우리만 아무리 그건 틀렸다고 해봤자, 전세계사람들은 콧방귀만 뀝니다.


3) 진실은폐가 아니라 삼국의 역사 중 한산주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한산주를 성훈처럼 저기 석가장에다가 놓을 수 없습니다. 한산주는 백제-고구려-신라 순서로 차지한 땅이며 아사달 남쪽땅입니다. 그런데 한산주를 석가장에 놓으면 아사달이 대체 어디로 갑니까? 저런 무당사학이야말로 없어져야할 사학입니다.

이런 무당사학류는 백제역사를 중국에 주기위한 중국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쇼.

더군다나 성훈이가 사료를 근거로 들었다고 했는데... 하하
번역도 똑바로 못하는 자가 예를 든 사료가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河가 황하입니까? 삼국사기 河는 황하가 아니라 일반명사 하천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 반론을 제기했는데도 무슨 내가 딴지를 건다고 그러시나요?
님도 어디 아래 문장을 보시죠.

平壤河水血色

위 문장이 어떻게 번역됩니까?

i) 평양의 황하가 핏색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해석되나요? 아니면
ii) 평양의 하천이 핏색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해석됩니까?

ii)가 맞죠. 그런데 성훈이는 무당사학이라서 河를 황하라 했으니 제가 반론단겁니다. 님은 그게 딴지로 보이십니까? 하하.


4) 그리고 이 성훈이라는 자가 쓴 다른 글들을 쭉 보시죠(다른 글들도 보시면 제가 왜 이렇게 저들에게 행동하는지 아실겁니다.)
욕은 저쪽 국수주의 애들이 먼저 시작했지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강단의 개"
난 사학전공도 아닌데 무슨 "강단의 개"니 뭐니 하는 욕아니던가요?
이상한소리 하지 마시죠.
뭐가 아니라는건지... 답글들을 쭉 보고나서 이런이야기를 하시죠.
욕을 먼저 시작한 것은 저쪽 대륙백제론을 주장하는 자들이지 내가 아닙니다. 똑바로 보세요.
아리송역사 08/08/14 [15:17] 수정 삭제  
  그렇군요..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역사를 개인적인 시각으로 봐라보면 안된다고 들었는데..
여기저기서 자기 주장들이 강하다보니 오해의오해가 더해져..
이렇게 감정싸움으로 이어져 온거 같습니다..
우리선조들의 역사 강역(한산주)의 위치는 약간 다소 의견차이가 있지만..
하북에서 복건성까지 차지했었다고 하셧으니...
어쨋든 현)지나족땅(산둥성 일대)이 우리역사 강역 안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거죠??
수도가 문제인데..수도가 어디였나에 따라..문제겠죠?
우리 역사학계에서..현 서울지역이 백제 한성 이라고 하는데..

이 사료를 봤을때..http://www.coo2.net/ 에서 보았습니다.
이 사료를 믿을수 있겠느냐 직접가서 증거를 확인했느냐
한번 전 할말이 없겠지만.. 뭔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으니
이런 글이 나오는거 같습니다만...
전 그냥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진위여부를 알아내기란..
힘듭니다..허나 여러분의 도움으로 조금이라도 더 알고싶어
한다는점 양해해 주십싯오..

< 현 서울 지역이 백제 한성(한산)으로써 일치하지 않는 점 >

현 한강은 581년 이전에 한강, 한수로 불리웠다는 증거가 없다.

백제 초기부터 현재까지 한수, 한강이라고 계속해서 불리웠다면 어떤 곳에서도
증거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581년에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비에 이곳이 한성이라는 증거가 없고
한성을 올라가는 길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581년 그 시대에도 지금의 서울 지역이 한성이나 한수 또 한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 한강 지역에는 堤防도 蛇城이나 崇山이란 지명이 없다.
(개로왕의 대 토목공사 흔적)

물론 1500년전의 흔적이나 지명이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자가 살고 묻힌 곳에는 하수 또 한수로 불리웠던 황하가 있고
숭산이 있고 제방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기록이 일치하는 지역이
현 서울 지역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개로왕때 연토축성의 흔적이 서울 지역에는 없다.

한반도에는 연토축성에 해당하는 흔적이 없다.

연토축성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 역사 사실적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데
한반도에는 벽돌의 성이 없으나 漢水 또는 한강으로 불리웠던 황하 유역에는
벽돌의 성이 많이 있다.

이것은 동이 귀한 지역이거나 벽돌의 사용이 일반화된 지역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황하지역은 돌보다는 벽돌의 사용 흔적이 더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로 보아서 벽돌의 성이 없는 반도보다는 지명과 일치하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석촌 고분군의 형태는 백제 명문 기록이 없는 대신 高句麗 고분과 외형이 같다.

강남의 고분을 백제 고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명문이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외형이 高句麗 고분으로 불리는 즙안 지역의 장군총 등과 같다는 것은
이 지역이 高句麗 지역임을 나타내고 高句麗 고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서울 남쪽인 중원 高句麗碑, 경주황남대총의 영락연호 잔, 창녕 진흥왕비에서 비리성은
서울 지역이 高句麗 일부임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백제 명문이 없는 것을
백제 고분으로 규정해서야 되겠는가 ?

믿고 싶지만..이 석연치 않은
우리역사학계에서 말하는게 딱 드러맞다면..의심이 생기지 않을텐데..
지금까지 나온 사료들중 확실한 사료가없어..
저같은 무지한 사람들은 위치를 못잡는게 현실입니다..
중립사학님도 시간이 되신다면 이런 칼럼이나 글을 한번 써주셨으면
하는데..저같은 무지한 사람들도 쉽게 역사를 이해하고 ..
올바른 역사를 공부하고 알아갈수 있게..
대한민국의 한국민으로 여러분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지키기위해서..
이러시는거 아니십니까?? 서로 힘을합쳐도..어떻게 될지 모를 이때..
중국과 일본에게 다 뺏길순 없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답변해주신 중립사학님께 감사드립니다..
중립사학 08/08/14 [16:25] 수정 삭제  
  가).... 한산주...우리역사에 매우중요한 지역입니다.

한산이란 곳은 패수의 남쪽 지대로 고조선과 고구려 평양의 바로 남쪽지대입니다.
즉, 패수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 유적이고, 한산주가 이 곳과 접하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동의하지 못하시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한산주는 낙랑군 지역입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일찍부터 낙랑군지역을 점령하여 도읍을 삼은 것이죠.

지나인들은 이상한 심리가 있어, 자기들 영토를빼앗기면 公으로 봉하느니 君으로 봉하느니하는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 지나기록 책봉기록은 대부분 영토를 빼앗겼다는 기록이죠.

따라서..

* 지나의 낙랑관련 책봉기록.
AD355 고구려 고국원왕 25년 낙랑공
AD372 백제 근초고왕 27년 낙랑태수
AD493 고구려 문자명왕 02년 낙랑공.
AD565 신라 진흥왕 26년 낙랑군공
AD594 신라 진평왕 16년 낙랑군공.
AD624 신라 진평왕 46년 낙랑군공
이하생략....

* 즉, 지나에서 본 낙랑군은,
1) 고국원왕 때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가,
2)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의 사이에 백제가 차지하고,
3) 근초고왕과 문자명왕의 사이에 고구려가 차지하고,
4) 문자명왕과 진흥왕의 사이에 신라가 차지하고,
5) 그 이후로 신라가 차지하던
땅이었던 곳이죠.

* 이에 들어맞는 신라의 땅은 한산주입니다.
1) 의 이전은 알 수 없지만,
2)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수도를 한산으로 옮겼으며,
3) 장수왕이 개로왕을 전사시키면서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고,
4) 진흥왕이 고구려의 한산군을 빼앗아 주로 만들었다.
5) 이후로 한산주는 신라의 땅이다.

즉, 한산주는 낙랑군지역 다시 말해서 고조선과 고구려 평양지역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 오해하기를 고구려가 먼저 차지하였다고 하지만 낙랑군을 뺏은 것은 백제입니다. 건국초기부터 백제는 낙랑군 서남쪽 지역을 뺏은것이죠. 그래서 백제건국 초기에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으로 말갈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낙랑군은 고조선 아사달 남쪽지역인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초기 강역 즉 한성은 요녕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석가장을 한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죠. 역사를 시대적으로 변하는 강토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체 문자와 단편적인 기록만 보고 해석한 것입니다.


나).....또 오해하는 것은 漢城의 "한"이 大의 뜻이냐?
아니죠.
계림유사에 漢米는 흰쌀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漢이라는 것은 우리말 "흰"을 음차한 것입니다.

漢山은 白山이고 漢水는 白水인 것입니다.

한수가 아리수니 뭐니 하는 것부터가 코메디입니다.

백제가 초기에 漢山(白山)의 漢城(白城)에 도읍하였기에 白濟죠.
百濟로 쓰는 것 부터 고려해봐야 합니다.

백제초기에 위례성에 도읍하였다가, 말갈과 낙랑으로 인하여 한수 남쪽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한수 남쪽으로 옮긴 영토의 북쪽 경계가 패수입니다. 그리고 마한으로부터 백제가 받은 영토는 100리 정도 밖에 안됩니다. 즉, 패수와 한수는 아주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한수를 황하에다 옮겨 심으니 문제죠. 한수를 황하에다 심는 것은 역사를 읽는 능력이 떨어지니 무작정 크게만 만들면 장땡인줄 알고 만들어 놓은 강역입니다.

3) 저보고 칼럼쓰라 하지만...
제가 이런 주장써봤자 채택이 되려나 모르겠군요.
이곳은 워낙 "중국땅=고대한국의 도읍"의 분위가 많아서요.

아리송님도 역사를 배우기 위하여 coo2뿐만 아니라 www.history21.org나 www.baedalguk.com 같은데 가셔야 안목을 넓히실 수 있습니다.
중립사학 08/08/14 [16:28] 수정 삭제  
  아래 링크된 글이 반도사관의 이론입니까?
http://pluskorea.net/sub_read.html?uid=10166§ion=section78§ion2=
전혀 아니죠.
그림이 지워져서 안보이지만 이런 주장을 합니다.

"해양제국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다"

그러나 아래글은 백제의 도읍이 지금의 서울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도사학이라고 치부됩니다.
아래 글을 반도사관이라고 주장하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백제의 항해술은 당시 세계최고였는데, 누구는 백제의 항해술을 가지고는 저 동남아시아까지 갈 수 없기때문에 백제는 산동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답글을 달았군요.
대체 뭐가 식민이고 뭐가 민족인지 아리송님께서 판단하세요.

http://pluskorea.net/sub_read.html?uid=10166§ion=section78§ion2=
아리송역사 08/08/14 [16:58] 수정 삭제  
  만주지역의 비류백제가 남으로 남하하기까지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할거 같고..
비류와온조 백제가 합류하는 과정 그리고..
대륙으로 진출과정이 좀더 자세하게 나온다면..
물론 시작이 중요하긴 하지만..
단지 출발을 반도에서 출발하였다고 식민사학이라고
몰아부치는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활동반경을 대륙을 짤라버리고 반도 안으로 가두어놓는것을
식민사학이라 하지 않나요??


http://blog.naver.com/breathjustic?Redirect=Log&logNo=50031749582
이 글에 보면
발해(이하 진단震旦이라 하겠습니다)의 5경에 이 지리를 맞추어 보면 아사달에 위치가
나온다는데..여기 지도에 그려진 위치가 맞을까요??
여기가 맞다면.. 한산주의 위치가..




중립사학 08/08/14 [17:13] 수정 삭제  
  알려주신 지도의 평양의 위치는 고조선 평양이 아니라 위만조선 왕험성위치군요.

고조선 평양을 위만조선 왕험성으로 보는 것은 지나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나 사실은 다른 곳입니다.

규원사화에 첫도읍(아사달, 임검성)에서 두번째도읍(평양)으로 옮길때 동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나오죠. 왜냐하면 백산의 서남에서 백산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으니까요.

지도의 아사달을 근거로 한산주는 대략 대릉하 정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라디오 08/08/14 [18:13] 수정 삭제  
  중립사학자님의 아이디는 무엇입니까?
라디오 08/08/14 [18:24] 수정 삭제  
  欽定元史語解卷十一
阿里, 回語大也

元史語解를 인용하는 걸 보니.. 희석님이 중립사학같군요.
저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거든요. 놀랍군요^^
요동경 08/08/15 [03:31] 수정 삭제  
  먼저 백제의 흔적이 동경요양부에 있는데...

* 외성(外城)을 한성(漢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름만 같은 것인지 실제로 백제의 한성인지 알 수가 없다.

* 개주 진국군의 옛 현인 웅산현...
백제는 남쪽으로 웅천이 경계인데...
여기서 웅산과 웅천은 熊만 같은 것인가?

*노주 현덕군의 옛 현인 漢陽양현....
여기가 한수의 북쪽 아닌가?

* 노주 현덕군 웅악현
백제의 초기영토로 보이는 웅악이 여기서 나온다. 서쪽으로 바다까지 15리라고 했으니 웅진이라고 이름한 이유를 알만 하다..
그리고 웅진이 공주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공주가 바닷가 항구인가? 아니다.
웅진은 요나라 노주 현덕군 웅악현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양과 웅천은 하나의 현덕군에 들어갈 만큼 가깝다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공주가 웅진이라면....
백제가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한성을 빼앗겨 남하하면서 모든 지명을 충청도 지역에 옮겨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동경 08/08/15 [03:32] 수정 삭제  
  *노주 현덕군 옛현... 상암현 백암현...
이건 고구려 현이다. 백제는 고구려 상암과 백암근처에 있었다.

* 요주 시평군의 옛현 蛇山현....
이것도 역시 고구려 현인데 한산주 소속이다.
그런데 이곳이 요나라 동경요양부 요주 시평군이다.
한산주는 요나라 동경요양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한성이 석가장이라는 것은 틀렸다.
요동경 08/08/15 [03:32] 수정 삭제  
  그러면 이제 숭산이 어딘가 보자...

요사지리지 동경도에 숭산이 나온다...

崇州隆安軍刺史本漢長岑縣地渤海置州故縣三崇山溈木縁城皆廢户五百在京東北一百五十里統縣崇信縣.
숭주(崇州) 융안군(隆安軍)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장잠현(長岑縣)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숭산(崇山) 위수(潙水) 녹성(綠城)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인데 숭신현(崇信縣)이다.

저 위에서 동경요양부에 백제의 흔적이 있다고 보였다.
그리고 여기 또 동경요양부에 숭산이 나온다.
백제는 요나라 동경요양부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동경 08/08/15 [03:33] 수정 삭제  
 
이제 드디어 개로왕이 쌓은 제방이 어딘가 보면....

한성을 이상한 황하에다가 비정하였기에 사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곳이 아니므로, 숭산이야 崇이라는 글자의 뜻이 좋으므로 여러군데 쓰이다보니 어쩌다 맞아들어갔겠지만, 뱀을 뜻하는 蛇는 안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뱀"을 가지고 지방명을 짓는 자는 드믈기 때문이고 한성은 황하가 아니기때문이다.

지금부터 사성과 숭산을 찾아줄테니 잘 보거라.

사성에서 숭산까지므로

사성蛇城은 요주 시평군 옛현 사산현蛇山縣이고.
슝산崇山도 숭주 융안군 옛현 숭산현崇山縣이다.

요나라 강역으로 따지면....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요나라 요주시평군에서부터 요나라 숭주융안군까지다....
강호사학 08/08/15 [13:47] 수정 삭제  
  숭산이 요나라 땅에 있다면 산이 많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분명 개로왕은 흙을 구워 성을 쌓았습니다. 이는 백제가 산악지역이 아닌 돌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요동걍님의 숭산은 개로왕과 상관없는 요나라와 관련있는 산으로 보입니다. 요동걍님의 숭산 남쪽에 큰 강이 있어야 할 것이며 제방의 흔적이 남아 잇어야 할겁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숭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에 있으리라 봅니다. 단지 개로왕의 숭산이 어떤 산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황하 북쪽에 있는 하남성의 숭산(소림사의 숭산)이 진짜 개로왕의 숭산입니다. 거기엔 아직도 제방의 흔적이 남아 있어 중국 군사지도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황하 강변은 산이 없는 지역이라 돌을 구할 수 없어 훍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을 수 밖에 없습니다.
크크 08/08/15 [14:23] 수정 삭제  
  이세상 모든 강변은 강을따라 제방을 쌓을만한 충분한 돌이 없습니다.
그런 강이 있다면 그게 비정상이죠.
강변의 돌은 거의다 축구공보다 작아요...
그렇게 작은돌로 쌓느니 흙으로 만드는게 더 경제적입니다.


더군다나 웃기것은....
개로왕때 쌓은 흙으로 만든 제방이 아직도 남아있을까요? 하하
동네 개천에 흙으로 제방을 쌓는다 하여도 100년도 못갈것입니다.

황하는 범람도 잘하고 물길도 바뀌고 그럽니다.
그런데 개로왕때 쌓은게 지금도 남아 있겠습니까?
남아있을리 없죠.
황하 제방은 그때만든게 아닙니다.
최근에 만들었으니 20세기 군사지도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저기 지도에 BC602~11세기까지 물길은 현재의 물길과 전혀 다르죠.
그러니 현재 제방은 개로왕때 제방이 아니죠.

황하근처에는 蛇산이라는 곳도 없지 않습니까?
숭산이야 어디든 많습니다.
그러나 사산은 글자가 안좋아서 그런지 잘 안보이죠.

동경요양부에는 존재합니다.

본기사의 주장이 틀렸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강호사학 08/08/15 [18:33] 수정 삭제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왜 강변에 작은 돌이 나오고 경제적이란 얘기가 나옵니까?
누가 작은돌로 쌓습니까? 어디에선가에서 큰 돌을 가져오는 법이지요. 강변 자갈로 뭘 합니까?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말꼬투리 잡기는....
크크 08/08/16 [01:11] 수정 삭제  
  이해가 잘 안되는 강호사학이구만. 남이 한 말이 뭔말인지도 모르믄서 ㅋㅋ

모든 강에는 제방을 쌓을만한 돌이 없소이다.
그래서 흙을 구워서 제방을 쌓은거요.

경제이야기를 왜하냐?
개로왕이 경제를 생각 안했다면 멀리 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쌓았을 것이외다.
그러나 개로왕은 경제적인 면을 생각했기에 주변의 흙을 구워서 쌓은거요.
산속에 쳐박혀 있는 강호사학이라서 세상살이가 뭔지 모르는구만.



더군다나
내가 말한 황하변동은 왜 언급 못합니까?
개로왕때 황하물길이 현재물길입니까?
아니죠.
그러니 현재 황하에 있는 제방이 개로왕이 쌓은 제방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코메디입니다.


짱깨공산당이 쌓은 제방을 가지고 개로왕이 쌓았다고 우기고 있으니 쯧쯧
이런게 코메디라는거죠.
개돌 08/08/16 [06:25] 수정 삭제  
  뭔가 좀 틀렸군요.
사산도 없는데 숭산이란 이름 하나가지고 개로왕의 방죽이라고 하는 것은 추측도 지나칩니다.

더군다나 현재 황하는 개로왕때 황하의 물길과는 전혀 다른 곳인데..
현재 황하에 방죽이 있다고 하여, 그 방죽이 개로왕때 방죽이라뇨..
하하
뭔가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
강호사학 08/08/16 [10:13] 수정 삭제  
  위 그림을 잘 봐라. 개로왕 때 황하의 물길은 안 나와있다. 뭘 제대로 보고 트집을 잡아라. 이 친일파 인간들아.
성훈님이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면 고맙다고나 할 일이지 시비걸고 트집잡고 엉터리로 말하고....이게 다 이승만이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왜 이렇게 우리나라에는 친일파들이 득실득실한지,,,,,
공부하자 08/08/16 [10:20] 수정 삭제  
  조조.손권.유비가 다투던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서 에 보면 마한.변한.진한의 위치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마.변.진한은 동서로 바다와 접해있다. 백제국이 속해있는 마한은 서쪽에 바다가 있고,동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다. 진한은 북쪽으로 예와 접해있다. 왜는 동쪽바다에 있다.변한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예 등으로 수출한다]그리고 를 보자...[비류가 왕위에 오르자, 온조의 신하들은 마한이 망해가고 있으니 남쪽으로 가자하여 배를 만들어 남하하여 마한에 도착했다]...를 보면 [온조백제는 서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큰 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으로는 평야가 넓으니 천하요지다...바다건너 백제가 있다는 내용이 무쟈게 많다]...여기서 명백히 마한은 동서로 바다와 접해있고, 북으로는 예(동예)와 접해있는 진한과 접해있으니 명백히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의미하며, 이 마한54개국에 달하는 소국들 중 하나로 온조백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기록이 [삼국지 위지 동이지전]의 내용이고,
개돌 08/08/16 [10:52] 수정 삭제  
  솔직하지 못한 성훈이 일부러 허접지도를 올려서 그런거다...
참으로 얍삽하구만... ㅋㅋ

현재물길과 개로왕 물길은 다르다.

황하변천사 공부좀 해라.


http://www.paulnoll.com/China/History/history-Yellow-River.html


요즘은 일본식민사학이 죽으니 중국식민사학이 뜨는구나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고.
무지한 백성은 그걸 모르고 땅덩이만 크면 좋은줄알고
얼씨구 절씨구
백제사도 이제 중국것이 되겠구나.
개돌 08/08/16 [11:12] 수정 삭제  
  자 봐라.
강호야
coo2에도 현재 황하물길과 개로왕때 황하 물길은 다르다고 떡하니 올려놨네.

http://www.coo2.net/files/산동해안선변화.jpg

성훈은 근데 왜 저런 허접지도를 골라서 올렸냐?
위 자세한 지도도 있는데...
중요한 연대만 쪽 빼먹은 지도를 잘도 골랐다.
강호사학 08/08/16 [12:07] 수정 삭제  
  식민사학의 폐해가 이토록 크거늘....
이승만이는 왜 친일파를 중용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이토록 버려놓았는지...
지랑스러운 대륙의 역사를 좁은 한반도로 끌고 오는 것이 일제 조선사편수회가 생긴 목적이니라. 거기서 이병도가 활약한다. 그리고 해방 후 그 조선사편수회 멤버들이 이 나라 강단을 점령해 버리고 그 후학들에 의해 장악되니 이 나라 역사는 아직도 안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로왕의 제방이 한강이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이론이 바로 식민사학의 이론이다.
개돌 08/08/16 [12:16] 수정 삭제  
  머리나쁘면 욕 잘하는것이 세상이치인가?

강호야.
욕할 머리 있으면, 그 머리로 공부해라.

이제 내가 개로왕때 물길이 지금 물길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더니...
할 말 없으니까 욕하냐...
불쌍하다.. 쯧쯧.
그렇게 행동하니까 너희들이 환빠라고 놀림을 받는거다.

저렇게 한성을 황하에 놓으면 좋아보이겠지.
저렇게 비정한 후 10년만 지나봐라. 백제가 중국사로 넘어간다.
강호사학 08/08/17 [01:01] 수정 삭제  
  개들님 (Dogs) 그러고보니 개가 몇마리입니까?
개로왕 때 물길과 현재 황하의 물길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지도를 잘 보고 댓글 달기 바랍니다. 그리고 숭산은 산악지대와 가까운 하남성에 있어 언제나 항상 황하는 그리 지나갑니다. 눈 크게 뜨고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흙읅 구워 벽돌로 성을 쌓는 지역은 대륙 동부평야지대(백제)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이 없으니 돌이 없지요. 돌이 있으면 뭐하러 흙읅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습니까? 돌로 쌓지...
참고로 고구려는 산악지대가 많아 돌로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돌보다 벽돌로 된 성벽과 건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성벽은 돌로 쌓고, 민가에도 돌과 흙으로 쌓습니다.
댓글을 달려면 제대로 알고 달던가 아니면 그냥 가만 있던가....
개돌 08/08/17 [11:16] 수정 삭제  
  현재 물길과 개로왕때 물길이 차이가 나므로...
현재 제방이 개로왕때 제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1m가 차이가 나던 1cm가 차이가 나던... 다른 제방을 의미하는것이다...
알겠느냐....
더군다나 눈대중으로 보니, 지금황하와 개로왕때 황하는 서울서 수원정도는 되어 보이오... 지도에서 차이가 적다고 실제로 적다고 생각하면 바보짓이오.

황하에는 사산이 없느니라...
숭산이야 어디든있다.
그러나 사산이란 지명은 오직 요나라 동경요양부에만 존재하느니라....

어디한번 황하근처에 사산을 찾아보거라.
사산도 없는 황하가 어찌 개로왕때 영토가 되느냐....
이것이 바로 우기기라는것이다.
지나가다 08/08/19 [17:33] 수정 삭제  
  저는 역사에 무지하여 성훈님의 글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길 할수 없습니다.
다만 기존에 알고있던 것과는 다른이야길 하시는것은 알겠군요..
여기 뎃글달고 계신 다른분들도 성훈님 만큼이나 연구하시고 노력하시는지 궁금 해 지는군요...
다른님들도 본인이 연구하신 글이 있다면 링크 부탁드립니다.
보고싶네요...^^
크크 08/08/20 [00:35] 수정 삭제  
  여러 사람의 연구한 글이 무지 많이 나옵니다.
한수를 한강, 임진강, 요하 등으로 비정한 글들이 많습니다.
성훈의 이야기는 엉터리죠.
후후 08/08/24 [03:53] 수정 삭제  
  자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사이에는 한수이(漢水)가 엄연히 흐르고있습니다. 게다가
그래놓고 아직도 漢水=漢江 이러시는데 지금 중국의 한수이(漢水)도 다른이름으로 한장
(漢江)이라고도 불린다는군요. 그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선시대부터 불린 한강(漢江)
에서 싸웠을까요 아니면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한수이(漢水)에서 싸웠을까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역사란 진실을 찾는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나라에 유리하게 바꾸는것이
아니지요. 우리한반도를 유구한역사로 만들기위해 진실을 바꿀수는없습니다. 세상은
거짓말을 하면 언젠간 들통나기때문이지요. 지금의 터키는 옛날 돌궐의 후손입니다.
그럼 그들은 중국인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엄연한 독립민족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중국에 있었다고 중국인인것이아니지요. 지금의 조선족을
보십시오. 중국에 산다고 한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도 다르지않았지요.
우리는 진실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럴필요없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논리에 반박조차 못하고
당하는 우리나라가 더한심할뿐이지요. 과거를 현재로 빗대서 보는것은 바보같은 논리입니다. 일본 즉 왜족이 처음부터 우리보다 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강대국이라고
고대에도 강대국이 아니라는것이죠.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문제점은 바로 지금의 힘을
가지고 역사를 바꾸고 있죠. 한심합니다. 지금 몽골은 굉장히 못살고있습니다.
허나 원나라의 역사는 지울수없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의 인구라던가
신라의 인구 등등을 볼때 한반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수치의 인구를 가지고있습니다.
역사는 거짓을 말하기전에 오류라는 것은 발생할수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삼국을
마음대로 개조하고있습니다. 한심할따름이죠.
후후 08/08/24 [03:56] 수정 삭제  
  이렇게 동북공정에 당하기만 하는것은 망국을 자초하는일입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입니다. 또한 중국은 억지 논리이지만 우린 억지가 아니지요. 충분한 근거를 들고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외국인에 대한 역사연구도 금지시켰다지요. 이것또한 수상합니다.
게다가 중국의 나라들은 생각외로 넓다고 나오지않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과대 망상증으로 중국은 더없이 크다라고 외치겟지만 사실 사서를보면 크게
차이도없었습니다.
역사 08/08/31 [19:46] 수정 삭제  
  개로왕이 한반도에 와 본 적도 없다면 하필 아차산성에서 죽임을 당한 건 이해가 안가고 동성왕이 남제에게 보낸 문서에 신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면서 전과를 보고한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전투지역이 자기나라라면 왜 남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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