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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쿠데타와 기자조선의 허구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허구로 가공된 이야기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9/20 [01:50]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기자조선의 허구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허구로 가공된 이야기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9/20 [01:50]
본 글은 아래와 같이 3부로 나누어 게재됩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2번의 군사쿠데타가 있었다. 한번은 1961년 5월 16일 당시 군수사령관이었던 박정희소장이 주축이 된 군사쿠데타이고, 또 한번은 1979년 12월 12일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소장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다. 이 2번의 군사쿠데타는 우리나라 헌정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  대한민국 쿠데타 현대사의 두 주역

 
먼저 쿠데타란 무엇인지 백과사전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쿠데타란 불어로 ‘coup d'etat’라 쓰며,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로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며,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 된다. 즉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이다.

혁명이 피지배계급에 의한 반란인데 비해, 쿠데타는 일부 지배 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되며 권력이동은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이동에 불과하다 하겠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 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改廢)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

외국의 쿠데타의 전형으로는 1799년 11월 9일 통령정치를 타도하고 스스로 제1집정이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51년 12월 2일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제정(帝政)에의 길을 연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있다.

위 백과사전에서 보듯이 쿠데타란 한문으로는 정변(政變)이라 하며 쉽게 표현하자면 기존 정권을 뒤집어엎는 것으로 무력으로 최고권력자를 내쫓고 정권을 탈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쿠데타를 성공시키면 국가의 모든 것을 전부 잡게 되고, 실패하면 반역도당이 되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모 아니면 도’에 목숨을 거는 정치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다.  

▲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 소장과 박종규 차지철 경호실장.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쥐게 된다.

 
조선왕조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쿠데타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려 중기에 정중부에 의해 일어난 ‘무신의 난’과 ‘위화도 회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상고시대에도 쿠데타라는 것이 있었는지, 또 있었다면 어떠한 쿠데타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단군조선 시대에는 어떤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단군조선 시대의 쿠데타

단군왕검은 B.C 2333년 개국 이래 천하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고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어오다, 약 천년 후 21세 소태단군 때 첫번째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에 의한 쿠데타이다. 이 사건의 전후 사정과 그 의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22대 색불루(索弗婁)단군에 의한 쿠데타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대 소태단군 49년인 B.C 1289년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킨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무척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단제(檀帝)에게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지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함에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豆莫婁)라 부르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현왕이란 단군께서 임명하는 제후의 하나였다는 것이 기록으로 증명된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이란 북방오랑캐인 흉노(匈奴)의 직책이라 말하고 있으나, 흉노 역시 단군의 후예이면서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의 제후였음은 말하지 않고 있다. 우현왕이 통치한 대략적인 위치는 현 서안의 북쪽이고 몽고의 남쪽인 서내몽고 오르도스 일대이다.

참고로 흉노의 기원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세 가륵단군 갑진 6년(BC 2177)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도록 하였다. 뒤에 그를 사면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匈奴)의 조상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  섬서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족들(단군족). 북이가 흉노이다. 빨간 글씨의 평양 일대가 우현왕이 다스린 강역.
 

“B.C 1286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중략)... 단제께서는 오가(五加)를 불러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였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다. 우현왕(색불루)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 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셨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우현왕이 22세 단제로 등극하는 색불루단군인 것이다.

<태백일사 마한세가>에는, “단군 색불루가 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 패해버렸다. 소태단군은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은 녹산(백악산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며 관제를 개정하고,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색불루단군에 의한 쿠데타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라 할 수 있다.

“색불루단군은 단군왕검 이래 삼한(三韓: 진한, 마한, 번한)으로 나뉘어 통치되던 것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꾼다. 진(眞)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니 삼한이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진(眞)조선의 땅은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여원홍으로 하여금 마한이 되어 막(莫)조선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番)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단군의 관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색불루단군은 B.C 1266년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한다.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케 하여 빈(邠) 기(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주민과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게 하였다. 여기서 빈과 기라 함은 장안(현 서안) 서쪽이며, 여국(黎國)은 장안 북쪽인 산서성 장치현의 서남인 여주(黎州)이다.

은나라 왕 무제가 번한을 거쳐 천왕께 글을 올리고 방물(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이 색불루단군 때가 단군조선의 군사력이 가장 강성한 때가 아닌가 싶다. 백성들에게 예의, 누에치기, 베짜기, 활쏘기, 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해 8가지를 금지하는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좌측에 빈, 기라는 지명이 보인다. 서안 바로 서쪽이다.

 
후세의 사가들 특히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은 이 색불루단군 이후를 후기 고조선이라 말하며, 색불루 전의 1,048년간을 전기 고조선이라 한다. 그러면서 후기고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없애버리고 기자조선이란 가공의 나라를 만들어 대체해 버린다.

즉 색불루단군을 북방오랑캐인 흉노로 만들어 버린다. 즉 고조선(전기)과 흉노(후기)를 별개로 본 것이었다. 단군조선이란 대연방제국 안에 흉노가 있었고 그곳의 왕을 고조선에서 임명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흉노 또한 단군의 후예였던 것이다. 그리고 색불루는 오리지날 흉노가 아니고 조선에서 욕살 벼슬을 한 고등의 손자였다.   

중요한 것은 모화사상에 눈멀어 명나라에 사대를 하려다 보니, 있지도 않았던 은나라 출신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억지로 맞추기 위해서는 색불루 이후의 후기고조선을 흉노라는 이유와 함께 우리 역사에서 도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허구의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

2. 43세 물리(勿理)단군 때의 쿠데타
<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 “43세 물리(勿理)단군 때 B.C 426년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서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해에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B.C 425년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이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화충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에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이라고 바꿔 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에오라지 한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 해성(海城: 요녕성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구물단군은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우화충이 쿠데타를 일으켜 도성으로 쳐들어오자 물리단제가 도망가 승하하고, 욕살 벼슬의 구물이 역도(逆徒) 우화충을 정벌함으로서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단제로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구물의 역쿠데타로 보아야 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   전두환은 합수부장 시절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를 잡는다. 결국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오르는 전두환 . 어찌 과정이 구물과 많이 닮은 것 같다.

 
3. 46세 보을(普乙)단군 때의 쿠데타
이후 단군조선은 내부의 정변과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힘이 크게 약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45세 여루단군 때 연나라와 제나라와 전쟁을 해 이기긴 해도 많은 국력을 허비하게 된다. 46세 보을단군 때인 B.C 341년에는 휘하의 번조선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번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기후(箕詡)의 번조선왕 등극을 어쩔 수 없이 사후재가하는 힘없는 정부가 되어 버린다.

46년(B.C 296년)에는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쿠데타를 일으키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가 돌아왔으나 국가의 힘이 약해져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개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대장군 고열가(古列加)는 43세 물리단군의 현손으로 보을단군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또 공도 있었기에 단군으로 추대된다. 이 분이 2,095년을 이어온 대제국 단군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단군이다.

막조선과 번조선에서의 쿠데타

44세 구물단군 이후 단군조선의 말기로 오면서 주축인 진조선 뿐만 아니라 휘하의 막조선과 번조선에도 정변과 외침이 끊이지 않아 단군조선 전체의 정치가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2,000년 가까이 이어온 거대한 대제국인 단군조선 폐국(閉國)의 전주곡이 서서히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막조선의 가리(加利)왕 시절 “융안의 사냥족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왕도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전나(典那)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맥으로 보아 수만이 쿠데타를 일으키긴 일으켰으나 정권은 빼앗기지 않고 손자인 전나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나, 막조선의 힘은 급격히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B.C 450년 전.후로 보인다.  

번조선에서는 B.C 341년 해인왕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5가가 다투어 일어났다고 한다. 군웅할거의 시대가 온 것인가? “연(燕)나라가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인 기후(須臾人 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천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고, 곧 진한과 번한의 병력과 함께 연을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화해를 요청했다.”고 한다. 여기서 험독이란 현 하북성 창려(진황도시)이며, 계성은 천진 부근이다.

마침내 “46세 보을단군 경진 1년(B.C 341년)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수한왕이 후사없이 죽자 B.C 323년 자칭하여 번조선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와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후는 쿠데타로 번조선의 권력을 잡고는 사후재가를 진조선의 보을단군에게 올려 승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대륙 봉부는 번조선, 만주와 한반도는 막조선, 그리고 하북성과 내몽고 일대는 진조선

 
왜곡된 기자조선의 정체는?

이후 번조선은 기후--> 기욱--> 기석--> 기윤--> 기비--> 기준(마지막 왕)으로 6대가 이어진다. 이들 6대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자조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은나라 사람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B.C 1122년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기자조선은 있지도 않았던 허구의 국가라는 것을 아는 국민들이 많지가 않다. 이토록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기자조선은 조선왕조가 지어낸 허구의 국가로 분명한 것은 기자는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운 적이 없다.

기자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25세 솔나단군 37년 정미(B.C1114년) 기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었고 인사를 사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자가 살던 시절 단군조선은 25세 솔나단군에 의해 통치되던 시절이며, 솔나단군은 88년간 조선을 다스렸는데, 어떻게 기자가 조선에서 왕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는 하남성(河南省)으로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경계로 보아야 하며, 기자의 무덤이 있는 곳은 안휘성(安徽省) 몽현이다. 하남성에서 살다 안휘성에서 죽은 기자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우고 평양에서 죽었다고 조선왕조와 식민사학계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

중화 사대주의가 극치를 이룬 조선왕조 때, 평양에 오지도 않았던 기자의 무덤까지 대동강 평양에 만들어 놓고는, 기자조선을 만들어 위대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두동강이 내는 엄청난 패륜을 저지른다. 여하튼 조선왕조에 의해 저질러진 이런 역사왜곡 행위는 마땅히 지탄받아야 할 것이다.


▲  기자가 살던 땅 하남성 서화, 묻힌 곳 안휘성 몽현. 이곳이 은나라와 조선의 경계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민족사왜곡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조정의 권력을 한손에 장악한 이성계는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우는 이른바 역성혁명(逆姓革命)을 이룩한다. 새 국가를 세우기는 했으나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고 또 역성혁명의 대의명분까지 없자 이성계는 강력한 외부의 힘을 끌어들인다.

그것이 바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자청하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내리고는 과거 비실비실했던 한족(명나라)의 조상들이 강력했던 동이족(조선)에게 당했던 피맺힌 한을 풀기 시작한다. 즉 한풀이인 역사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조선왕조 때에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대변되는 쿠데타가 몇 차례 있었다.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과 수양대군(후에 세조)에 의해 일어난 계유정난 등도 쿠데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변이 있을 때마다 조선왕조는 사후재가를 위해 명나라의 고명을 필요로 했고, 명나라는 승낙의 조건으로 역사왜곡을 지시한다.

왕자의 난(쿠데타)으로 집권하는 태종, 두 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는 세종, 계유정난(쿠데타)으로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하는 세조, 형이 있음에도 왕이 되는 성종, 반정으로 왕으로 올려진 중종 등의 고명을 명나라로부터 받아내기 위해서는 조선왕조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야 했다. 뇌물과 접대는 기본으로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명나라는 조선왕조의 이러한 정변(政變)과 부정(不正)을 허락하는 대신 조상들의 역사왜곡을 요구한다. 그래서 허구인 기자조선이 창조되는 것이며, 고대사서가 수거되어 불살라지고, 삼국사기가 조작되는 것이며, 반도사관이 생겨나는 것이다. 게다가 공자를 정신적 지주로 모시게 되고 나중에는 치우 대신 군신으로 관우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기자조선은 선초 정도전과 권근 등이 만들어 선조 때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에 의해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조의 유학자들에 의해 허리가 잘려 반토막이 된 단군조선은 급기야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배하면서부터는 신화로 둔갑하는데, 그것이 해방 62년이 지나도 회복이 안되고 있는 현실이다.

▲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 "  조선이란 국호와 기자조선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다.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다는 주 무왕의 명을 받는다로 시작한다.


조선왕조는 기자조선이란 B.C 1122년부터 1대 문성대왕(기자)로부터 41대를 내려와 929년간 존재했었다고 왕계를 허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의 이야기일 뿐이다. 기자조선의 실체란 단지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단군조선의 한 축인 번조선 말대에 쿠데타를 일으켜 번조선의 왕이 되어 6대를 내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기후--> 기욱--> 기석--> 기윤--> 기비--> 기준(마지막 왕)으로 선조인 기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고 기준은 자기네 조상을 전부 왕으로 추존하게 된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이다. 따라서 단군조선 다음에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명나라의 충견(忠犬)이 되겠다고 작정한 조선왕조에 의해 저질러진 어불성설의 거짓이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에 기자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자조선은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가 아니며, 후손인 기후가 번조선의 왕으로 집권한 것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쿠데타가 아니라, 지방 정부(제후)에서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군조선의 주축인 진조선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이론을 보면, 단군조선은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으로 넘어가면서 이어진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기자가 단군조선을 접수해 기자조선을 세웠고, 또 연나라 정치망명객 위만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되어있다. 그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지역에 한나라가 4군을 설치했다고 하며 한4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  대륙동부에 있었던 한사군을 북한 지역으로 끌고온 매국식민사학계. 이들의 매국 행위 때문에 언젠가는 북한 땅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한사군이 있던 위치는 옛 조선의 강역의 일부이다.

이 이론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이 땅을 영원히 식민지배하기 위해 허위로 지어낸 엉터리 이론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이 해방 후 민족반역자 이병도와 그 후학들에 의해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병도의 후학들은 일제사학을 신봉하면서 강단을 점령해서는 엉터리 이론으로 자라나는 학생들의 얼(혼,정신)을 빼고 있으며, 아직도 엉터리 이론을 가지고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는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친일파들을 자신의 정치적 세력으로 포용하여 중용함으로서, 이 땅에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이 뿌리내리게 한 이승만대통령의 크나큰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 이대통령의 잘못으로 인해 이 땅이 다시 외적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제는 영원히 나라를 되찾지 못할 정도로 국민들의 정신이 썩게 되었다.

<한단고기>를 우리 민족의 정사서로 인정하여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진실을 교육함으로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는 길만이 이 나라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하겠다.


다음 주에는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가 연재됩니다.
광나루 08/09/22 [03:18] 수정 삭제  
  글을 쓰려면 고기나 사서를 좀 읽고 나서 제대로 이해한 후에 써야지 전조선과 후조선의 경계를 1,048년으로 보는 것은 어디서 근거한 것이오? 단군조선이 건국된 후 1,048년이면 은나라가 망하기 훨씬 전 아니오?

단기고사나 강단사학자들이 말하는 전조선과 후조선 경계는 비록 기자의 동래가 허위지만 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하고 있는데...

또 막조선에서 무슨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것이오. 색불루가 일으킨 쿠테나를 막기 위하여 막조선이 출병하였다가 마한이 죽고 막조선이 패하였다는 것인데...

그리고 사기 흉노전에는 하수, 낙수, 경수 이북에 만주기마족 무리가 중국의 북, 서 등지를 점령했다고 나오는데, 위 지도는 중국의 중심부가 거의 만주 기마족이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디에 근거하여 지도를 그린 것입니까?
광나루 08/09/22 [03:23] 수정 삭제  
  기자조선은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가 아니며, 후손인 기후가 번조선의 왕으로 집권한 것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쿠데타가 아니라, 지방 정부(제후)에서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군조선의 주축인 진조선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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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같은 현상에 대하여 하나는 쿠테타 라고 하고 하나는 쿠테타가 아니라고 하고,
번조선을 기후가 무력으로 점령하여 이후 기씨가 임금이 되는 조선국이 탄생했는데,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아 나라를 세운 것이 쿠테타가 아니면 뭐가 쿠테타입니까?
광나루 08/09/22 [22:56] 수정 삭제  
  어휴 여기 또 사람 또 있네,

전조선과 후조선의 경계가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1,048년이라고 말하는 이 하고는 동지쯤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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