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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市'논란, 이게 가당한 일이던가?

그가 왜 아직도 추앙받는 인물일까

강욱규 칼럼 | 기사입력 2014/03/17 [13:51]

'박정희市'논란, 이게 가당한 일이던가?

그가 왜 아직도 추앙받는 인물일까

강욱규 칼럼 | 입력 : 2014/03/17 [13:51]
[플러스코리아타임즈-강욱규] '박정희市' 논란은 박승호(56) 새누리당 경북도지사 예비후보가 2014년 3월 9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하며 시작됐다.
 
경북 포항시장을 지낸 그는 이날 경북 구미의 박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자리에서 “외국에서도 가난의 한을 푼 대통령으로 ‘박정희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구미시보다는 박정희시가 구미를 외국에 훨씬 더 잘 알릴 수 있어 수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주장하며 논란이 일어났다.
 
'박정희'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현재 자칭 '보수'세력에게 몰표를 던지는 한심한 560세대가 얼마나 까막눈 세대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구미에서 1917년 태어났다. 그후 주목할만한 그에 대한 기사가 있다.
'
만주일보 1942. 3. 24' :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라고 기사가 나온다.
'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이것은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 후 조센징이라는 신분적인 결함을 피하기 위해 일본 천왕에게 충성 혈서맹세를 하며 썼던 내용이다.
 
일본 천왕에게 충성혈서 맹세를 한 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일본인 포함하여 박정희가 유일하다.
▲ 일본군장교 다카키 마사오 중위 사진     © 강욱규 칼럼니스트

또한 그는 그 혈서를 통해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만주국의 독립군토벌 특수부대 소위가 되어 독립군을 토벌했는데, 그의 동기인 한 일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특이했다. 독립군이라는 말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야지 가야지'를 외쳤다고 한다.
 
항일의사님들이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할 때 그는 오히려 그 의사님들을 토벌했으니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죄는 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그것 뿐이랴? 그는 처음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에서 조센징 냄새가 난다면서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다시 한 번 창씨개명한다.
 
'오카모토 미노루'기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유명한 일본 낭인 두목이다. 과연 박정희는 그를 모르고 그의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을까?
▲ 남로당 군책 박정희     © 강욱규 칼럼니스트

그는 그후 광복이 되자 잠깐 좌익으로 변신하여 조선남로당 군책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반공을 세운 최초의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그가 과거 이런 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이승만정권당시 다시 국군 장교가 되어 장면내각 당시 5.16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일으켜 한국의 정권을 잡았다.
 
또한 한일협정 당시에는 굴욕적인 외교로 나라를 팔아먹었다. 또한 그의 수하였던 김종필은 오하라(한일협정 회담 당시 일본측 대표)와의 비밀메모교환에서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너무 일본측에 유리한 한국의 양보로 오히려 일본측에서 한국국민들의 반대가 심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 KBS 일요스페셜 메인 화면     © 강욱규 칼럼니스트

1966년 미국 CIA 보고서 (KBS 일요스페셜)에 따르면,  민족문제연구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1966년 3월의 미 CIA 특별보고서를 공개하고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다.
 
▲ 미 CIA 븍별보고서 발췌화면     © 강욱규 칼럼니스트

이 문건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전후해 전개된 한·미·일 3국간의 비밀협상 과정과 불법정치자금 수수, 독도문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측은 1962년 미 국무부가 주한·주일 미 대사관에 발송한 전문을 근거로 제시하며 한·일협정에 미국이 깊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 연구소 보고에 의하면, 1965년 한·일협정에 임해서 한국 집권자가 일본쪽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뇌물을 받고 한국에 불리한 한·일협정을 체결해 준 것이 밝혀졌다. 당시 6600만달러는 오늘날의 몇 백억달러에 이르는 거액이다.
 
놀라운 것은 당시 일본은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 무상 6억달러 배상을 하고 국교를 재개했다.
 
한국은 36년간 강점당해 온갖 살육·투옥·착취를 당하고 무상 3억달러를 그것도 ‘배상’이란 이름도 못부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았으니 웬일인가?   
 
한·일협정에서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독도문제 회피(독도 폭파 희망 피력 등),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징용·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익 손실을 내면서 대부분 일본쪽 주장대로 협정에 서명해 준 이유를 당시 순진한 우리민족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 집권자들이 6600만달러의 일본쪽 뇌물을 받고 국익을 팔아먹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당시 순진한 우리 국민과 학생들은 군사정변 주동자들이 아무리 양심이 썩었어도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배상받는 회담에서 일본 뇌물을 받고 국익을 팔아먹는 매국적 외교를 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국력부족으로 ‘굴욕외교’를 한 것으로 짐작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수교배상금은 그렇게 정치를 못하던 이승만도 일본에 30억달러를 당시 돈으로 요구했고, 장면내각은 27억달러를 요구했는데, 박정희 및 김종필은 3억달러에 합의 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팔아먹은 제2의 이완용같은 인물들이 대선후보로까지 나올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며, 또 그들로 인해 위안부할머니들의 배상문제나 강제징용,징병 피해자들이 배상받을 길이 이 한일협정으로 영원히 막혔다는 사실은 참으로 통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또 과거 정권들이 일본에 대해 독도문제를 크게 발언시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베트남전에서의 파병, 독일에 광부, 간호사들을 파견한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새마을운동으로 나라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면내각에서 이미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초안이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고, 한일 수교배상금으로 장면내각이 요구한 27억 달러를 그당시 돈으로 받았더라도 베트남전 파병이나 독일에 간호나 광부를 파견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경부고속도로 5 - 6개는 충분히 건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베트남전 파병자들은 오히려 박정희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사실이다.
 
또한 유신헌법제정, 민주주의 인사 탄압 등 엄청난 민주주의의 훼손을 낳았다.
 
그외에도 많은 그의 친일 및 민족배반적인 행적이 있으나 현재 알려진 바로는 이정도이다.
 
위의 언설들만 해도 박정희가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나쁘고 해가 되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과연 '박정희市 노란'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절대 안될 일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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