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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의 4불가론 등 역사왜곡은 그 옛날부터

주변국은 자국역사 부풀리기 바쁜데 우리는 축소하기 바쁘다

강욱규 칼럼 | 기사입력 2014/06/10 [00:30]

'위화도 회군'의 4불가론 등 역사왜곡은 그 옛날부터

주변국은 자국역사 부풀리기 바쁜데 우리는 축소하기 바쁘다

강욱규 칼럼 | 입력 : 2014/06/10 [00:30]
[플러스코리아 타임즈-강욱규] 역사의 기록이란 본시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나 한때 중원을 지배하던 우리의 상고사가 분서갱유로 인하여 말살되고, 또 일제 시대때 조선 팔도의 희귀 사서들이 화사(火死)를 당하여 지금은 상고사는커녕 우리의 올바른 역사마저 축소왜곡되고, 또 우리 스스로도 환단고기 등 그나마 남은 상고사의 역사서들을 위서(僞書) 취급 하고 있음에 안타까움은 금할 길이 없다. 

또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한 번 뿐인 왕의 나라이자, 사대주의의 끝판왕인 조선시대야말로 우리 역사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유수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국력이 조금 신장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교과서의 오점을 바로잡으려고 나서기 전에는 우리는 조선시대를 독립된 나라로 알고 있으나, 그들 나라의 역사교과서에는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한반도는 중국영토로 기술되어있는 나라도 비일비재했을 정도다.
▲ 이성계 영정     © 강욱규 칼럼니스트
조선의 개국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라고 할 수 있다. 변방출신의 일개 무관이었던 이성계가 각종 반란과 왜구, 홍건적의 침입을 패퇴시키면서 신망을 얻고 신진사대부들의 열망을 한 몸에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이 없었다면 고려의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감히 설 수 없었으리라.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우왕이 그를 곁에 두고 싶어한 점이 컸다고 알려져있다. 공민왕이 환관들에게 시해되고 그가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과 더불어 왕권이 약했던 우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최영장군의 서녀를 왕비로 삼아 왕권강화를 꾀했다. 그러고보면 우왕은 역사가 전하는 아둔한 임금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 최영 장군 영정     © 강욱규 칼럼니스트
그리고 최영장군의 요동정벌론은 묘청의 금국정벌론과 달리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설한 4불가론을 살펴보자.
 
첫째,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범할수 없다는 말을 이성계의 이전 원정에서 그 모순이 드러난다. 만의 군사로 명나라보다 강병인 몽고군을 상대로 요동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토 고 선언하고 그대로 철수한다.. 이소역대 불가론은 말도 안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주의 기초가 되는 망발이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사대주의로 깊이 흐르게된 괴수같은 논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큰 나라를 범할 수 없으면 큰 나라의 개가 되고 매년 조공을 바치고 그 외 여러 사대주의의 행위를 해야만 한다는 말이던가?

둘째, 남해안을 침공하는 왜구의 경우 얼핏보면 일리가 있어보이지만 이성계의 4불가론에 대해 최영의 답변중 왜구의 건에 대해선 빠져 있다. 즉, 있었다고 어렵고, 설사 왜구의 발호가 심했다면 최영이 요동정벌론을 내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 역사서에 보면 왜구의 침입횟수는 선왕인 공민왕대보다 우왕대 확실히 감소한 것을 볼수 있다. 또한, 왜구의 침입은 든든한 해군을 보유한 고려보다 그렇지 못한 명에 더욱더 치명적 피해를 안겨 주었다고 전한다. 오히려, 왜구때문에 명이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셋째, 농번기이고, 여름철이라 무기가 약해질 수 있다는 내용과 넷째, 홍수철이라는 내용 역시 사료의 앞뒤가 맞지 않는 오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불가론의 허구성을 드러낸 것은 이성계가 최영의 정벌론을 수락하고 우군도통사를 맡은 것이다

정말로 요동정벌에 반대하였다면 그 부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순신처럼 옥에가서 절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거부했어야 한다.. 우군도통사를 맡아 도중에 회군하여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고, 아주 논리적이지가 못하다. 

결국, 요동정벌론을 수긍하였다는 것이다.

위화도회군이 자주와 사대, 고려와 조선의 대립으로 과장되게 표현하는 말이 나오지만, 만약 이 시기가 조선이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려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군령에 대한 정치제도의 통제가 바로 섰다면 가능할 것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바로서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부산공격을 거부한 이순신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당시 출정하는 고려군은 관병이 아니라, 군벌들의 사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의성이 강하였다. 개경에 사는 세력가 권신들도 사저를 지키기 위해 사병을 양성하는 것이 묵인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고려후기를 기술할 때 외적의 침입,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강조하지만, 권신들의 사병으로 인한 왕권의 추락은 그 당시의 실정으로 보았을 때 더욱 위협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1388년은 이성계와 최영외에 이인임과 조민수도 주목해야 한다. 선왕인 공민왕이 환관들에 의해 피살되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는 상황에서 즉위한 우왕은 즉위 공신 이인임의 횡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란을 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이인임 일파의 횡포에 시달린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의 도움을 요청했고, 최영과 이성계는 이인임을 제거하게 된다. 이 때가 1388년이다. 

이인임의 잔당들이 반란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한다. 사실, 이것도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당시 북원과 명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중국 내부에 한림아, 장사성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이고, 왜구의 침입등 고려와 전면전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명이 북원을 생각보다 빨리 대파하였고, 요동으로 출정하였으면 명나라에게 패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크게 조력하는 요점이다. 이는 4불가론중 첫째에 해당하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은 요동정벌을 추진하지만 그로인한 반대는 심했다. 고려사에서는 이성계만 부각하지만 실제론 권신세력들의 반대는 이성계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은 밀어붙이게 된다. 당초, 요동정벌에는 최영이 도원수로서 참여하려 했으나 환관들마저 믿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우왕은 최영더러 자신을 보호하라고 왕명으로 서경에 남으라고 했다. 

이것이 위화도회군의 원인이며, 우왕과 최영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벌을 계획하고 진두지휘해야 할 도원수가 압록강에 가지 않고 평양에 눌러앉아있으니 일반병사들의 불만은 커질수 밖에 없었고 압록강에 들어서면서 예상치 못한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홍수가 나고 병사들이 질병에 걸리고 각종 악재가 쏟아진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위화도회군의 4불가론은 후대에 만들어진 조선개국의 정당성을 기획하여 만든 역설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회군은 이성계가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로 조민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불가능했다. 

즉, 조민수가 실제로 주도하고, 이성계가 마지못해 따른 것이지, 이성계가 상관인 조민수에게 '회군하여 도원수를 칩시다'하고,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사료에서도 회군이후 당시 좌군도통수 조민수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이성계는 창왕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1389년에 들어서서야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즉, 위화도회군은 조민수가 주도한 것이라 봐야한다.

만약, 회군하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서면 어땠을까? 물론 역사에 있어서 ‘이랬으면‘이라는 물음의 대답처럼 현명하지 못한 일도 없다고 하지만 물론 원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당시 요동땅은 무주공산이었는데, 이성계가 요동원정에 나선 게 몇번째인가하면 무려 4번째이다. 그동안 3번이나 요동을 치고도 영토화하지 못하고, '요동은 우리땅'이라고 선언만하고 철수하고 만다. 

공민왕의 경우, 정사에 소홀한 채 죽은 왕비의 그림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왜구가 남해안을 약탈하거나, 국내의 반란세력의 암살 위협 등 고려조정은 정벌과 철수를 반복 요구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이성계와 그의 군사들을 괴롭힌다. 

이런 경험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회의를 가진 이유라고 봐야할 것이다. 

어쨋든 최영장군은 죽어서 무속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신(武神)이 되었고, 이성계는 살아서 기껏 왕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도전 및 정몽주, 그리고 이방원의 하여가, 정몽주의 단심가 등 지금만 역사왜곡이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게 있어왔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친일파 정권에 의해 축소되고 왜곡되고 있다고 외치지만, 그 이전의 중원을 호령하던 상고사, 그리고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축소된 고구려의 영토,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상고사가 날아가버린 진시황제 때의 분서갱유, 그리고 일제시대의 문화정책 등 우리의 역사는 오롯이 말살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분서갱유를 묘사한 그림     © 강욱규 칼럼니스트
문제와 필자의 안타까운 점은 일본의 보수와 우익은 자국의 역사를 확대,포장하려는데, 우리의 보수이며 우익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있는 역사마저 날조. 왜곡. 축소하려든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조선의 개국 무리들이 꾸며낸 4불가론의 첫번째와 닮아도 너무 닮아있다. 바로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이다.

우리가 배우는 하여가, 그리고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의 단심가 등 또한 일제가 조선사편수회와 더불어 만들어내었고, 그때 만들어진 한국사의 큰 흐름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그것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것을 달달 외우게 만들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민족이자 알 수 없는 나라다.

주변국들인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지방정권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고, 또 일본 또한 자국의 역사를 확대하고 포장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자국 역사를 폄훼하고 사대주의.식민사관으로 축소.왜곡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런 자칭 보수세력들에게 무지한 많은 국민들이 표를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 민족사학의 선구자 단재 신채호. 일본의 사대주의 사관으로 주류 역사를 만든 이들이 있는 반면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같은 분들은 바른 국사를 정립하는데 혼신을 다한다.     ©강욱규 칼럼니스트
 사대주의에 대해 ‘역사를 我와 非我의 싸움’ 이라고 하신 민족주의 사학의 태두이시고 무장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선생의 유명한 한 구절을 읊으며 마무리 한다.

단재-신채호선생의 불세출의 명언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 것이 어쩐 일이냐!

이 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 것은 바로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혀 바로알게 할 것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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