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사랑도둑] 그녀, 쇼윈도 부부 2회
임서인
남편과 각방을 5년 쓰고 있다는 그녀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휘향에게도 전화를 걸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오라했으나 일을 하느라 올 수 없다 했다.
선영이 땀을 흘리며 그녀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저쪽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이 구리빛으로 타서인지 아니면 고민으로 기미 주근깨가 얼굴을 덮어서인지 어두워보였다. 그녀는 선영이 자신의 방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가움에 손을 번쩍 들었다.
“무슨 바람이니? 내가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오지도 않더니. 안색이 나쁜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들어가자. 오늘 강의는 이제 없으니 나가서 점심이나 먹자.”
“네 얼굴…….”
“무슨 날씨가 이리도 덥니? 가을의 입구에 들어섰는데도 더우니 짜증난다. 휘향이 만났다면서? 다른 친구들은 본 적이 있니? 네 남편은 아직도 너에게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니? 글쎄, 나, 어제 쇼핑을 했는데 이 옷 잘 어울리니? 우리 남편이 이 옷을 보더니 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하더라. 웃겨. 언제 나에게 관심이라도 있었다고 나한테 어울리니 마니하고 충고를 하니? 너, 점심 안 먹었지?”
그녀는 선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도 쉴 새 없이 말을 뱉어내는 바람에 선영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도 시끄러운데 오늘도 지혜의 말만 듣고 가는 것이 아닌지 선영은 그만 질리고 말았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쉴 새 없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번뇌한 마음으로 그녀의 수다를 듣는 것은 괴롭기 그지없다. 선영은 오늘만은 그녀가 입을 다물어주었으면 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자신의 방에 놓고 손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녀의 남편이 어울리지 않다고 한 원피스는 길이가 짧을 뿐 상큼하게 보였다.
아마도 남편은 교수가 입어야 할 치마의 길이가 짧아 보인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어서인지 종종 걸음으로 선영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온 거리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할퀴려던 햇살의 손톱이 짧아져있었다.
그녀들이 들어간 곳은 지하의 사랑채였다. 창호지문이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는 방은 서너 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달랑달랑했다. 여기 오는 도중에도 쉴 새 없이 떠드는 지혜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고 했지만 머리가 멍했다.
“뭐 묵을래? 아줌마, 이걸로 주세요.”
선영이 먹고 싶은 것을 메뉴판을 눈으로 훑기도 전에 그녀의 손가락이 메뉴를 다 읽고는 순두부탕을 시켰다. 그리고는 선영의 모양을 쭉 훑어 내렸다. 그녀의 쳐진 눈썹 사이로 눈알이 잠시 멈칫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간혹 네 말 도중에 내가 자꾸 내 말만 하려고 하면 제지를 해야 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내 입이 가벼우니 말야.”
그녀가 웃었다. 선영도 웃었다.
야윈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다가 그녀들의 방문 앞에 앉았다. 주인이 손에 소형 가스렌지를 받쳐 들고 오자 사뿐히 반대쪽으로 뛰어간다. 나비야, 얌전히 들어가 있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출입구 쪽으로 가 앞발로 문을 박박 긁는다. 긁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홀 가운데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젊은 남녀 옆에 가 앉더니 꼬리를 바닥에 쭉 뻗는다. 꼬리 끝이 흔들린다. 여자의 눈 끝의 방향을 고양이도 바라본다.
주인이 가져온 음식을 차리는 동안 선영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주인을 따라온 고양이의 눈과 그녀의 눈이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혜의 둥근 아미는 초승달 맹키로 잘 다듬어져 있어 약간 교태스러웠다. 그 교태가 오른쪽 뺨만 불그레스레한 것과 잘 어울려 묘한 매력이 풍겼다. 겨울에 잠깐 흰 듯 하다가 봄이면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금새 까매지고 마는 그녀의 피부는 여름이 되어서는 혼자서 햇볕을 죄다 받았는지 더 까맸다.
“이혼하려고? 네가? 설마?”
“나도 할 수 있어.”
“네가 이혼을 한다고? 너만은 참아낼 줄 알았는데.”
“남편에게 가장 사랑받지 못한 내가 이혼하는 것이 뭐 이상하니?”
“넌, 조선시대 여인처럼 지고지순하잖니?”
“그러는 넌, 5년을 각방 쓰고도 이혼하지 않았잖아.”
“체면 때문이지. 그 사람 내년에 도 의원으로 출마한다더라. 이혼은 애초 그른 것 같다. 대신 서로의 이성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 은밀하게 하라더라. 선거를 치르면 상대 후보가 절대로 알 수 없게만. 그 말에 나도 그러기로 했다. 쇼윈도의 부부처럼 살기로 말야. 그래서 어제 사진관에 가서 우리 두 사람 멋진 사진 찍었지. 거실과 내 블러그에 올려놓고 남편의 블러그에도 올려놓으려고.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산에서 어깨동무하고 사진만 찍고 내려오기로 했다.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인양 연출하고.”
“그런 부부 많다더니……. 나도 그런 교양이라도 떨었으면 좋겠구나. 역시 가방끈이 긴 사람들은 은밀하게 싸우는구나. 내 남편도 그런 교양 안 떨어도 좋으니 나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면 얼마나 좋겠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게 있을까? 이제는 그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얼른 벗어났으면 할 때도 있어.”
선영의 슬픈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에 그녀는 선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체, 손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길고 가냘픈 흰 몸이 그녀의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었다.
“슬픔을 이제는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은 고통일 텐데. 우리에게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건강하게 하는 것인데…… 이제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난 그 사람과 각방을 쓰면서도 한번도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래도 넌 나보다는 나았구나. 제기랄, 난 내 남편을 생각하면 슬프지 않아. 무엇 때문일까? 차라리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는 제자의 딱한 사정을 아는 것이 더 슬퍼. 내 남편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몰래 주고 싶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요염한 자태의 담배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떨이로 옮겨졌다. 그녀의 중추신경에 도달한 니코틴이 그녀를 오르가슴 직전의 흥분을 주었다. 남편을 흉보는 자리가 깔려지는 순간만은 가슴이 후련하고 희열을 느끼곤 했다. 얼굴에는 웃음, 가슴에는 뭔지 모를 경멸을 한가득 담고서 남편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슬프면 슬픔의 표정을, 기쁘면 기쁨의 표정을, 섹스 중, 터져 나오는 괴성을 지르고 싶을 때는 지르는 솔직함만큼, 그녀는 그러고 싶었다.
사라졌던 회색 고양이가 다시 그녀들 방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누가 너희 부부를 보고 사랑이 없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까? 네 남편의 매끈한 말씨에 난 기분까지 좋더라. 그런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너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선영이 회색 고양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양이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쭈, 하고 그녀의 마음이 말했다. 한번도 누군가의 눈을 이리도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없다. 남편의 눈을 몇 초 사이에 바라보았을 뿐, 그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마음을 교환하고 사랑을 교환했던 적이 없다. 눈꼬리를 올리며 남편에게 교태를 부려보지도 못했다.
텔레비전에서 연기자가 올린 눈꼬리 끝의 핑크빛으로 물든 애교를 남편은 부러워했다. 그녀는 고양이의 눈에서 그녀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옮겼다. 선영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가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왜 멀리할까?
“갈등 없는 부부가 어디 있을까마는 사랑이 식으면 남보다 못한 것이 부부겠지.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으려 해야 하는데, 희미한 불씨 하나만 있어도 다시 살려내야만 하는데, 왜 우리는 그 불씨를 살려내고 싶어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가 궁금할 때도 있어. 사실 내 남편이 아닌, 그 누군가를 사랑해 본다면 흥미가 있지 않을까? 다만 자식을 다 키워놓고 말야. 오십이 넘으면 서로에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아참, 오늘만은 네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또 잊었다. 자, 이제부터 난 듣기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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