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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환단고기]를 정사서로 인정하는 길 만이 민족사 바로 세울 수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2/09 [23:17]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환단고기]를 정사서로 인정하는 길 만이 민족사 바로 세울 수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2/09 [23:17]
얼마 전 박노자라는 국적 불명의 한 유태계 강아지가 이상한 논조로 고구려에 대해 헛소리로 지껄인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 한마디로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기사였다. 그런 떠돌이 강아지가 멍멍 짓는 소리를 기사화 하여 우리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신문사의 역사인식이 더 큰 문제이다.

국민의 여론을 주도한다는 언론이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엉터리 역사칼럼을 함부로 기사화해 국민정신을 좀먹게 하고 황폐화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가희 매국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 칼럼을 싣는 언론이 대한민국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왕은 King으로, 황제는 Emperor로 적는다. 그리고 왕국은 Kingdom, 제국은 Empire라고 한다. 그럼 우리 고대사의 고구려/발해는 왕국인가 제국인가? 즉 Kingdom으로 적어야 할지 Empire로 적어야 할지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고조선시대와 북부여시대에 임금인 단군을 단제(檀帝)로 불렀고, 고구려/대진국(발해) 시대에는 황제로 칭했다. 그러므로 영어로는 King이 아니고 Emperor로 써야 하며, Kingdom 대신에 Empire로 써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를 적을 때는 ‘The Korea Empire’로 적어야 하며, 광개토태왕은 ‘The kwanggyeto Emperor’로 적어야 한다.

그리고 나라의 임금을 가르키는 황제라는 용어는 진시황 때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단어이고, 우리는 단군, 성왕, 명왕, 태왕, 대왕 등 다른 용어를 사용했음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걸 중국식으로 이해해 고구려의 X왕을 마치 중국의 제후인양 간주하여 우리 역사를 해석하면 엄청난 역사왜곡인 것이다. 같은 의미를 한족과 우리가 서로 쓰는 용어가 달랐을 뿐이다.

즉 고구려는 임금을 왕 또는 X왕이라 했고, 중국은 임금을 황제라 하고 임금의 아들이나 친척을 왕(제후)으로 봉해 외지를 관리하게 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왕은 대통령이고, 중국의 왕은 주지사 격이다. 그러함에도 고구려의 임금(대통령)이 왕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중국의 제후(주지사)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임금의 용어만 중국의 황제와 다를 뿐, 독자 연호를 사용한 자주국이었으니 당연히 중국식으로 부른다면 황제라 해야 옳다. 이상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국방장관은 아니지 않은가!

▲   고구려 대제국을 있게 한 개마무사의 철기병. 당시에 천하무적으로 현대 장갑차와 탱크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신라계 고려인인데다가 지극한 모화사상에 젖어있던 유학자라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건원칭제(建元稱帝)한 사실을 적지 않았으며, 신라가 23대 법흥왕 때부터 독자 연호를 쓰다가 28대 진덕여왕 때에 비로소 중국의 연호를 쓴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다. 그러면서 삼국이 중국에 수도 없이 조공을 올렸고, 중원의 황제가 매번 조서를 내려 삼국의 왕으로 봉했다고 적어 놓았다. 즉 삼국의 왕들은 중원 황제의 제후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조상과 민족의 역사적 진실보다는 자기의 정신적 지주인 공자와 중국을 더 흠모 했고,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고려인으로 태어난 것을 몹시 애통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부식은 정작 공자가 논어에서 “나는 구이(九夷:단군조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子欲居九夷)”라고 말한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왜 공자는 구이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고의로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기록을 적지 않았으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건원칭제한 고구려의 왕들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  )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연호, 제황명)
  1대 동명성왕(?) (다물, 고주몽 성제) 책봉기록 없음
  6대 대조대왕 (강무, 태조 무열제) 책봉기록 없음
19대 광개토왕 (영락, 광개토경호태열제) 책봉기록 없음
20대 장수왕 (건흥, 장수홍제호태열제)
(진) 고구려왕낙안군공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송)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
(남제) 표기대장군
21대 문자명왕 (명치, 문자호태열제)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남제) 거기장군  (양) 무군대장군개부의동삼사
25대 평원왕 (대덕, 평강상호태열제)
(북제) 요동군공고구려왕 (진) 영동장군 (주)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수) 대장군요동군공
26대 영왕왕 (홍무, 영양무원호태열제)
(수) 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28대 보장왕 (개화, 보장제)
(당)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

게다가 김부식은 신라가 삼국통일했다는 위업을 강조하기 위해 하대(下代) 신라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던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전혀 언급 안한다. 대진국 역시 건원칭제한 국가였다는 것이 <환단고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참고로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은 중국식으로 시호와 묘호와 연호를 사용한다. (  )는 사용 연호.

1. 세조 진국열황제(대중상, 중광)---> 2. 태조 성무고황제(대조영, 천통)---> 3. 광종 무황제(대무예, 인안)---> 4. 세종 광성문황제(대흠무, 대흥)---> 5. 인종 성황제(중흥)---> 6. 목종 강황제(정력)---> 7. 의종 정황제(영덕)---> 8. 강종 희황제(주작)---> 9. 철종 간황제(태시)---> 10. 성종 선황제(건흥)--->11.장종 화황제(함화)---> 12. 순종 안황제(대정)---> 13. 명종 경황제(천복)---> 14.애제(청태)  *(청색 9개 연호는 중국 사서에도 나와 있는 연호임)

혹자들은 “우리나라 최고이며 불후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도 않은 고구려의 건원칭제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판정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는 건원칭제를 한 사실이 없고, 단지 민족적 감성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희망사항을 적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두 사서의 기록이 서로 다를 때에는 정오(正誤)를 판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유물이 있으면 된다. 만일 유물이 없으면 주변국의 사서를 참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건원칭제한 사실은 유물과 주변국의 사서 두 가지로 다 입증할 수 있다. 

1. 주변국 사서의 기록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隋書)>에 보면 “位宮玄孫之子 曰昭烈帝 (위궁(산상왕)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 말한다)”라고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소열제(昭烈帝)라고 적어 놓았다. 중국에서 고구려의 임금(왕)을 자기네 방식으로 황제라고 적은 것이다. 고구려 임금 중에서 유독 고국원왕만 황제였을까?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수서>에서 소열제라 칭한 고국원왕에 대하여 왜곡된 기록이 있다.
* 13년 왕은 아우를 시켜 연나라에 들어가 칭신(稱臣)하고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 25년 연나라는 왕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왕(樂浪公王)으로 봉하였다.

<수서>에는 황제로 쓰여 있는 고국원왕이 연나라에게는 신하로 칭하며 어떻게 왕을 책봉 받은 것일까? 김부식이 <수서>를 참조 안했을 리가 없는데, 소열제(고국원왕) 부분에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 때문에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발해)이 독자 연호를 쓴 사실은 <신당서 발해전>에도 나와 있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건국을 대조영부터로 보고 있으며, 광종의 ‘인안’부터 장종의 ‘함화‘까지 9명 황제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만 독자 연호를 썼을까?

무릇 연호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발해가 독자적인 황제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사서에 고구려/발해가 버젓이 독자 연호를 쓴 황제국이라고 적어놓고도, 고구려/발해는 자기네 지방정권이란 터무니없는 동북공정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거짓임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2. 유물

▲  불상 뒷면에 장수제의 건흥5년이라 쓰여있다.
현 집안에 있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생략) 이어 17세(世)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이하 생략).”

비문에 나와 있듯이 광개토태왕은 ‘영락’이란 존호(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호는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천제의 후손으로 17세를 전함은 당연히 황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중국에서 쓰는 황제라는 용어 대신에, 광개토왕은 ‘태왕’이란 우리만의 용어도 썼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고려대왕(高麗大王: 장수열제)’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장수왕에게는 우리만의 용어인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   정효공주의 묘지석. 문왕의 연호와 황상이란 글이 적혀있다.
1949년 길림성 돈화현에서 발견된 4대 광종 세종문황제 대흠무의 2녀 정혜공주의 묘비와  1980년에 발견된 4녀 정효공주의 묘비에는 문왕의 연호가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었다는 사실이 적혀있고, 광종을 ‘황상(皇上)’으로 적은 것이 발견되었다. 비문에 적혀 있기를 “(이전생략)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이하생략)" 

이러한 유물들로 인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비문의 발견은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내기 전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진국 세종문황제의 연호가 ‘대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선생과 계연수선생이 이 무덤 안에 미리 들어가 보고 또 중원고구려비와 불상이 발견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태백일사>를 썼을까?

본시 북부여와 고구려는 한나라로 보아야 하나 편의상 고구려만 따로 떼어 보면, B.C 58년  건국되어 A.D 668년 망했으니 그 존속 기간이 726년간이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의 왕조 변화를 보면 아래와 같이 9왕조가 고구려와 만나게 된다.



B.C206 전한(前漢)--->A.D5 신--->25년 후한(後漢)--->220년 3국시대--->265년 서진--->317년 동진과 5호16국시대--->439년 남북조시대--->581년 수--->618년 당(唐)

중원의 통일국가 중 300년가량 된 국가는 당나라(290년) 뿐이며, 200년가량 된 나라도 전한(211년)과 후한(195년) 뿐이고, 신과 서진과 수나라는 단명으로 그친다. 나머지는 삼국/5호16국/남북조시대로 찢겨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도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어떻게 이런 나라들이 700년이 넘는 사직의 대국 고구려를 일개 제후국(지방정권)으로 둘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종주국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지방정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지방정권은 종주국이 없어지더라도 대물림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방정권(제후국)이 어떻게 감히 건원칭제를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거지이고 허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각국에서 삼국의 왕을 봉했으며, 삼국은 수시로 여러 나라에 조공을 올렸다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 전성기인 장수왕/문자명왕 시대에도 온통 “사신을 X나라로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즐비하다. 중원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나라들에게 삼국이 왕으로 책봉 받고 조공을 올렸다는 기록을 믿어야 할까? 또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원래 중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왕으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서 스스로 자국이 황제국임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고 또 일방적인 자기네의 습성이었다. 즉 책봉은 서로의 문화 차이로 이해해야 하며, 조공은 외교사절의 파견으로 봐야지 그걸 액면(글자) 그대로 보고 역사를 해석하면 곤란하다.

▲   고구려제국의 역사의 진실. 주변국들을 연방으로 또는 직속으로 편입했다. 
황제로 칭한 대국(고구려)이 뭐가 아쉬워 중국의 일개 작은 나라에게 왕의 책봉을 받을 필요가 있었고 조공을 수도 없이 올렸겠는가? 아마 중국이 보낸 책봉조서를 보고 고구려의 황제들은 가소롭다고 웃고는 문화의 차이 때문에 대꾸도 안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구려의 위 황제들은 중국과 상대로 전쟁을 해 고구려의 강역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책봉을 받고 조공을 올린 제후국이 종주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 영토를 넓혔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서로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을까?

위에서 보았다시피 유물과 다른 사서의 기록으로 입증된 <환단고기>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은폐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강단사학계는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는 일제의 분서갱유에도 살아남은 책이다. 왜 살아남았을까? 이유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빼야 하는데 <삼국사기>라는 사서가 자기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반도사관의 빌미를 일제에게 제공하여 악용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환단고기>를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정사서(正史書)로 인정하는 길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일본의 황국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왜곡한다면 조상과 민족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길만이 국가와 민족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다음은 “연방제국 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가 연재됩니다. 
윤복현 08/02/10 [16:33] 수정 삭제  
  [성훈 칼럼리스트:고구려는 임금을 왕 또는 X왕이라 했고, 중국은 임금을 황제라 하고 임금의 아들이나 친척을 왕(제후)으로 봉해 외지를 관리하게 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왕은 대통령이고, 중국의 왕은 주지사 격이다. 그러함에도 고구려의 임금(대통령)이 왕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중국의 제후(주지사)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중원의 통일국가 중 300년가량 된 국가는 당나라(290년) 뿐이며, 200년가량 된 나라도 전한(211년)과 후한(195년) 뿐이고, 신과 서진과 수나라는 단명으로 그친다. 나머지는 삼국/5호16국/남북조시대로 찢겨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도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어떻게 이런 나라들이 700년이 넘는 사직의 대국 고구려를 일개 제후국(지방정권)으로 둘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종주국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지방정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지방정권은 종주국이 없어지더라도 대물림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방정권(제후국)이 어떻게 감히 건원칭제를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거지이고 허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왕'은 본래 한자의 의미가 [천=지=인]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된 '하나'라는 의미의 '삼한이즘'의 신앙의식의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왕으로 명명하든 황제로 명명하든 단군조선과 부여를 잇는 900여년의 정통성있는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가지국가(선비족 계열)에 불과한 수나라와 당나라 등에 비교가 될 수 없으며, 고구려인들 스스로가 그런 역사적 정통성에서 비롯된 자부심과 긍지가 강했기에 북서쪽으로는 시베리아에서 티벳과 중앙 아시아 근접 지역까지,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만주(연해주 포함)와 산동반도와 산서성과 홍콩(복건성)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경영한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비웃을 일입니다. 즉, 레벨자체가 안되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도 안 되는 의미가 된다 할 것입니다. 고구려 영토인식에 있어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유태계 한국국적자 박노자의 고구사 깎아 내리기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학자의 양심을 외면한 논리에 불과하다 할 것이며, 동방족(동이족) 문명과 역사의 위대성을 기록하고 있는 [한단고기]는 설령 표현과 형태가 조금 차이가 있다 하여도 그 맥에 있어서는 동방족 문명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한족의 역사왜곡적 문헌내용들에 비하면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왜곡하지 않는 문헌내용들과 문헌내용들을 입증하는 유적유물,그리고 유전학를 토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하지 자신들의 편에서 조금이라도 왜곡해서는 안 되는 인류사적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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