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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한국귀환에 일본인도 슬피 울어

참석한 100여명 일본인 "무릎을 꿇은 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해"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3/29 [11:59]

'코무덤'한국귀환에 일본인도 슬피 울어

참석한 100여명 일본인 "무릎을 꿇은 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해"

김성애 논설위원 | 입력 : 2010/03/29 [11:59]
1993년,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胡伐峙) 유적지에 일본에서 환국한 코 무덤의 봉안식이 거행됐다. 2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여 기독교. 천주교. 유교. 불교의식으로 안장식이 진행되었다. 일본 비젠시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는 로고스게(임진왜란 당시 일본병사) 후손 등 일본스님을 비롯한 1백 10여 명도 참석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했다. 400년 만에 흰 도자기에 담겨진 흙으로 돌아온 조상들의 추도식은 거창하고 화려함의 극치였다.
 
거국적인 환국 안장식을 끝으로 겉치레는 요란한 소리만 냈다. 전북 부안의 호벌치에는 코 무덤의 묘비 하나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어느 손길도 미치지 않았다. 일본 비겐시에서는 해마다 제사라도 지내주는 일본인들이라도 있었지만, 고국에서는 무슨 놈의 제사, 그냥 돌 박스에 처넣었다.
 
인사만 들릴 요량이 이장식까지
 
임진왜란 전쟁이 끝나고 왜군 로고스게는 슬프게 죽어가면서 저항했던 조선인들을 기렸다. 자신의 고향 오카야마현 비젠시의 야산에 소금에 절여진 코 무덤을 묻고 사당을 지었다. 후손에게 자신의 시신도 코 무덤에 같이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당에는 천인비총(千人鼻塚)) 코 무덤이라 표시판이 있었다. 400년 동안 후손들이 코 무덤에 재를 올리고 있었다. 삼중 스님이 사당을 찾을 때는 14대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부산에 있는 대학교수가 발견한 코 무덤의 소식에 삼중 스님은 부리나케 일본 비젠시를 찾았다. 4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과 막걸리로 제를 올렸다. 이런 한국인의 모습에 로고스게의 후손들과 동네 사람들이 사당에 모여들었다. 삼중 스님은 코 무덤의 이장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코 무덤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를 지내고 나니 화가 치끓었다. 그래서 로고스케 후손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당신들이 우리 선조의 영혼을 모시고 가지 못하게 하면 그 때는 이 동네는 쑥밭이 될 것이다.”는 엄포에 완강했던 후손들은 이장을 승낙했다. 그러더니 언제나 모셔갈 수 있는지를 유족 대표는 물었다.

▲  삼중 스님이 코 무덤에 묻혔던 영혼을 이장하고 있다. ©브레이크뉴스
 
이장일을 묻는 현실적인 질문은 먹먹한 거짓말을 쏟아내게 했다. 지금은 봄이니 가을쯤에는 될 것 같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런 삼중 스님의 거짓말은 사후 대책이 없는 즉흥적인 마음에서 저질렀으나 큰일임에는 확실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시켜서 저지른 일이니 말을 꺼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했다.

코 무덤의 영혼들은 보고 듣고 있었다. 막막했던 현실은 잘 풀렸다. 너무나 순조롭게 풀렸다. 이장의 의식인 천도재를 일본스님이 돕겠다고 나섰다. 일본스님은 자신의 돈으로 주변 일본스님들을 불러 모이는 역할을 자청했다. 처음으로 일본에서 만난 박효자 신도는 이장에 필요한 경비의 일부를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이총의 영혼식을 크게 도와준 가끼루마 스님도 한 몫을 보탰다. 일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마치 이스트를 넣은 반죽처럼 풍성한 빵이 만들어졌다.

일본의 코 무덤 이장을 위해 일본 측에서는 200여명, 한국 측은 40여명, 물론 기자들도 따라 나섰다. 신문에서도 코 무덤의 이장에 대한 기사들은 연일 크게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에 1991년 겨울에서야 가장 고심을 했던 이장 장소가 해결되었다. 여수에서 유명한 유지 한 분이 삼중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가 모시겠다. 모실 이유가 있다. 이 충무공의 성지인 충민사 그 곳으로 모시겠다. 그러면 충무공도 기뻐하실 것이다.” 삼중 스님은 여수로 쫒아 내려갔다. 정 아무개라는 유지는 정치적인 야망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삼중 스님의 움직임에는 기자들이 나서서 ‘코 무덤의 이장은 충민사’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내보냈다.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 여수의 공보실장이 삼중 스님에게 전화를 했다.

“삼중 스님! 초면에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다. 지금 한창 신문에 떠드는 코 무덤은 여수로 가지 오지 못한다. 어제 여수 시의회에서 공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여수시장의 지시다. 결의된 내용을 공문을 보내는데 전통(전화통화)으로 먼저 통지한다.”

삼중 스님은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왜 좋은 일인데 무슨 말이냐? 뭘 결의했냐? 코 무덤이 왜적의 영혼이냐? 뭘 잘못 알아서 그리 결정하지 않겠느냐? 정 아무개 유지가 다 결정된 일이라고 해서 마지막 떠나는 시점에 이런 결정을 한국 사람이 할 수 있느냐?” 공보실장이 꺼낸 뒷말은 반협박이었다. “만약 여수로 코 무덤을 강행한다면 여수 시민이 영구차를 뒤집어 버리겠다.”는 마지막 통보는 무서웠다. 코 무덤을 안장할 수 없다는 이유가 더욱 한심한 작태였다. 400년 전의 패전의 슬픈 역사가 여수로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수는 충무고의 승전의 도시이니 충무공의 철학에 맞지 않다는 이유가 국가적인 입장이라니 봉창이 터져도 팍 터뜨릴 일이었다.
 
“오밤중에 코 무덤 도굴하자”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코 무덤의 이장을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대표, 스님들이 일본으로 출동했다. 기자들도 취재거리가 충분하니 따라 나섰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내일 아침에 거행할 이장식에 대한 회의를 했다. 회의는 점차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에서 가져온 이총의 이장형태는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무르익었다. 일본에서는 영혼의 존재만을 믿으니, 이제는 코 무덤 자체를 파서 가져가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한국인은 실체가 없으면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혼 이장식만을 허락 받았을 뿐 무덤까지 파는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문제였다.

기자 한 사람은 긴급제안을 꺼냈다. “오늘 밤에 가서 파버리자, 우리 선조의 묘를 우리가 파는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것도 그럴 듯 했다. 그래서 최종 결정을 삼중 스님이 내렸다. “맞다. 내가 책임지겠다. 밤 2시쯤 삽과 곡괭이를 가져가서 파버리자!” 얼마나 황당한 결정이었는지 스님으로 그런 결정은 의협심에 충만한 분위기 탓이었으리라. 전원 모두는 흥분하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에 코 무덤을 발견했던 대학교수가 문제점을 거론했다. “좋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사당 옆에 집이 한 채가 있는데, 개를 키우고 있다. 무덤을 파는 사이 개가 짖기라도 한다면 동네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현장에서 잡히면 망신만 당한다.” 적절한 시기에 흥분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개를 지적하면서 개망신 당할 운세를 막아준 셈이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독립군인양 모두 한 덩어리로 뭉칠 기회를 한 마리 개 때문에 판이 깨졌다. 일본에 묻혀있는 코 무덤을 도굴한다는 이야기의 소재는 만화에서나 등장하는가 했더니 우리네 지식인들의 충성어린 마음에서도 그려졌다.

그래도 추모위원회를 이끄는 선봉장으로서 삼중 스님은 다시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망신을 당하는 것은 결국 코 무덤에 묻혀있는 선조를 망신시키는 꼴이다. 그냥가자. 차선책으로 좀 일찍 가서 유족의 대표를 설득시키자. 합리적으로 동의를 받아내자.” 코 무덤 선언문을 낭독한 후 회의를 종결시켰다. 약속시간보다 3~4시간 빠른 시간, 아침 8시전에 아무런 예정 없이 유족 집을 찾았다. 로고스게 후손은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의 준비는 다 끝마쳐 놓았다면서 곡차를 내주었다. 이런 친절한 분위기에 삼중 스님은 굳은 입은 열었다. “미안하지만, 코 무덤을 파서 이장해야겠다. 무덤의 부피도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 후손입장에서 파서 모시고 싶다. 무덤을 두고는 제대로 명분이 서지 않는다. 허락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코 무덤 이장 행사에는 일본인들도 참석 했다.   ©브레이크뉴스
 
 
유족 대표는 찬찬이 삼중 스님을 쳐다보더니, “그래 하시라. 몇 사람이 왔는지 모르나 파가지고 가라.” 이리 순순한 허락에 삼중 스님은 눈을 둥그레졌다. 그렇다. 일본인에게는 무덤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흙은 아무런 의미도 아니라는 색다른 문화의식을 증명해 주는 현장이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족의 허락과 동시에 삼중 스님의 머리에는 어제 밤의 도굴계획이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뒷목을 젖혔다. ‘만약 어제 밤에 삽과 곡괭이로 무덤을 도굴한 현장을 오늘 이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우리 국민을 어찌 보았겠는가?’는 미망한 마음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이리 국민들의 의식은 서로 간에 달라도 너무 달랐다.

코 무덤을 1~2미터 밑까지 파내려 갔다. 흙뿐이었다. 400년 전에 묻힌 코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덤을 완전 폐쇄했다. 족적만 남겨 놓았다. 일본 유족들은 표시판에 코 무덤을 고국으로 이장했다는 설명을 해놓겠다는 약속을 했다. 많은 흙을 다 가져올 수 없었다. 우선 큰 단지에 담는 이장식을 올렸다. 일본의 노스님과 한국의 노스님 두 사람이 받아서 전달하는 형식을 택했다. 일본 노스님이 한국 노스님에게 흙을 날라서 단지에 담았다.
 
처녀귀신 이정순의 나이 17살
 
행사는 한국 노스님이 흙을 담는 단지를 안는 것으로 끝마무리를 했다. 나머지 흙은 쌀가마니 두 개 정도만 큰 상자에 담았다. 행사를 끝내고 떠나는 길에 한국 노스님은 삼중 스님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다. “끝마무리쯤 단지를 안고 있는데 떨어뜨릴 뻔 했다. 저 사당 옆에서 처녀귀신이 나왔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말하더라. 이름은 김점순, 나이는 17살인 처녀 귀신의 고향은 전라도 해안가라고 했다. 코가 끊겨서 이대로 갈 수 없다면서 통곡했다. 이 슬픈 한을 풀고 가야하는데 이리는 못 간다면서 몸부림쳤다. 약혼해놓은 정혼자와 며칠 뒤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왜놈들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내일 모레 결혼식을 올려야 되니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잔인하게 겁탈 당했다면서 통곡했다.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나를 죽이고 내 코를 끊겨진 한을 풀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한이 많은 처녀 귀신은 귀신 중에 가장 무섭다. 삼중 스님은 노스님의 말에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부터 노스님은 신기가 있는 분이었다. 처녀 귀신이 자신의 이름, 주소를 말해 주었으니, 늦었지만 제를 한국에 가서 지내주자는 약속을 했다. 두 스님은 기도를 올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쌀 두가마니 정도만 상자에 담았다. 흙 상자를 어깨에 메면서 2킬로미터에 떨어져있는 배까지 운반해야 했다. 두 가마의 흙더미는 엄청나게 무거웠다. 그래서 젊은 법룡 스님이 적격이었다. 법룡 스님은 염불을 잘하는 스님이었다. 삼중 스님의 뜻을 좋아해서 자신이 알뜰히 모은 200만원을 코 무덤의 이장식에 내놓았다. 힘이 장사인 법룡 스님은 흙 상자를 매고 부둣가까지 갔다. 그 앞에 삼중 스님은 위패를 들고 갔다. 흙 상자를 배에 잘 모셔놓고, 태극기로 감싸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법룡 스님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삼중 스님의 몸을 자신의 손으로 깍지를 껴서 끌어안았다. 무당처럼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기쁘다. 스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삼중 스님을 껴안은 채 몸을 흔들었다. 삼중 스님은 화들짝 놀라서 법룡 스님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워낙 장사인데다 뭐에 쓰였던지 손아귀의 힘은 도저히 풀 수 없었다. “400년 만에 스님이 아니면 어찌 우리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 이 말에 삼중 스님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다. 법룡스님의 몸에 코 무덤의 혼이 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신들이 보이지 않으나 입을 통해서 고마운 말을 전했다.

삼중 스님과 법룡 스님의 고함소리에 주변에 있던 이건호가 달려왔다. 서로 싸우는 형상처럼 보였던지 두 사람을 온 몸으로 떼어놓았다. 그래도 계속 법룡 스님은 삼중 스님에게 조아리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잠시 후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이건호가 괜찮냐는 말을 건네니 “내가 뭐했습니까?”하면서 자신의 행적을 기억하지 못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코 무덤의 영혼들은 400년 만에 돌아가니 많이도 울었다. 여기저기에 혼들이 실렸다. 그러나 삼중 스님만은 느끼지 못했다.

한국에 도착하니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바로 코 무덤의 이장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삼중 스님의 포교당, 부산 자비사에 모셔다 놓아야만 했다. 일본 측의 유족들은 한국에서 거행하는 안장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신들도 함께 참석하기 위하여 삼중 스님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해왔다. 연락을 받을 때마다 삼중 스님은 답답한 마음에 새빠지게 목탁만 두들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일본 유족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다.
 
코를 끊고 끊긴 후손들의 눈물
 
자비사 포교당에 코 무덤을 모셔놓은 지 4~5개월 뒤 전북 부안 문화원장이 갑자기 찾아왔다. 부안에 있는 호벌치의 내용이 담긴 문서를 내보였다. 고문서에는 임진왜란 당시 코가 끊긴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부안의 호벌치는 임진왜란 때 유적지로 이런 기록에 근거하여 코 무덤을 부안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삼중 스님은 일본의 유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일본 조문인사는 일본스님을 포함하여 110명이나 왔다. 물론 일본의 조문 중에는 코 무덤 후손인 로고스게의 14대 후손들도 끼어 있었다. 7~8명의 유족들은 자신들 경비로 부안까지 찾아왔다. 부안에 사는 왜놈에게 코가 끊긴 후손들 20여명도 안장식에 참석했다.
▲  코 무덤 이장식 행사 장면.    ©브레이크뉴스
 
 
안장식을 끝내고 면장실에서 우연하게 양국의 후손들이 서로 마주 앉게 되었다. 이런 우연한 기회에 삼중 스님은 서로를 자연스럽게 인사시켰다. 그랬더니 면장실 안의 조용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세상에 이런 일에 나올만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로고스게의 후손 7명 전원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빌었다. 400년이 지났지만 선조의 죄를 울면서 사죄했다. 너무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한국 후손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20명 전원 모두 일본 후손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끌어 앉았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삼중 스님은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인은 이렇게 가슴이 따뜻하다. 정이 많다. 이리 쉽게 용서를 했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한국인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400년 전의 참혹한 짓을 용서하니 영혼들도 함께 풀어주시기 바란다.” 삼중 스님도 함께 울면서 영혼들에게 고했다.
 
1993년 장엄한 행사는 부안 문화원 군수 및 공직자들은 다 참석했다. 코 무덤의 성역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오늘 날까지 묘비하나, 표시판 하나 세워놓지 않았다. 참석한 문화원장과 군수도 다 바뀌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호벌치의 유족지에는 연례행사로 재앙을 잘 모신다. 그러나 코 무덤의 돌 박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뒤에 공보실의 호벌치 직원이 했던 말이 아직도 삼중 스님의 기억에 생생했다.

“스님 4~5년 전쯤 뭘 갖다 놓았죠? 귀찮으니 빨리 가져가라. 직원들 모두가 귀찮아한다. 스님이 임시 모셔다 놓고 팽개쳐 놓으면 어떡하냐?”

삼중 스님은 마음은 분하고 원통했다. 부안의 문화원장이 자청해서 안장식까지 해놓고는 딴 소리에 아픔으로 남았다.

답답한 마음에 부안의 지인에게 삼중 스님은 코 무덤의 안부를 물었다. “재 모시느냐?” 연례행사대로 행하는 재는 역시나 코 무덤의 영혼들은 빠져있었다. “내 죽기 전에 풀어야 할 숙제다. 경주의 땅을 살 때부터 목적이 있었다. 그 어른들을 모시기로, 내가 죽은 후에는 영원히 잊힐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경주로 옮기고 싶다.” sungae.kim@hanmail.net

[제휴사=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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