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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논단] 작가여, 글을 써라!

정은하 시인 | 기사입력 2012/11/20 [09:56]

[문학논단] 작가여, 글을 써라!

정은하 시인 | 입력 : 2012/11/20 [09:56]

Ⅰ. 들어가는 말

[문학=플러스코리아]정은하 시인= 제목은 동의어 반복의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의 개념에는 이미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에서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것은 그만큼 중차대한 의의와 주장하는 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가 쓴 글을 내보임으로써 그 존재 의의를 천명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작가에 있어서 글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그의 진면목 즉 정체를 입증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그에게 부여된 이름이 있듯이 생존의 의의와 가치 및 목적은 한정되어져 있다. 이를 본 논단에 구체화하여 말하면, 모든 작가들은 그들만의 독특성이 있으며 그에 근거한 글들은 작가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들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작가는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여 글 쓰는 이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작가가 글을 쓰고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일반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며 음미하는 영역을 확대해 주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전업 작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충분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면으론 이미 작가로 이름 붙여진 이상 그에 걸맞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만이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담보하며 문학의 가치를 고양하고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 사회와 역사 앞에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생각에 미친 결과, 점차적으로 일상화하는 나태를 걷어내고 작가들의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창작열에 불을 댕기려는 일념에서 이번 논단에 접하게 되었다. 


II. 글감은 무한하다

가끔씩 여러 작가들로부터 글을 쓰게 되는 소재 즉, 글감이 소진하여 글을 쓰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작가 자신의 ‘사고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 하겠다. 문학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글감은 무궁무진하다. 적어도 이러한 생각을 전제한다면 ‘소재의 빈곤’은 더 이상 언급할 대상이 될 수 없다.

문학의 대상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다. 개체적인 인간의 삶 또는 관계로서의 사회적인 삶, 인간이 누려온 역사적인 삶과 그 결과로서의 문화 활동 등은 모두 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한 우리 주변의 동물, 식물 등과 우주 천체 자연의 모든 모습은 우리의 문학적인 소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풍요한 주변이 있는데 어찌 ‘소재의 빈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소재들을 동원하여 작가들은 모름지기 글을 써야 한다. 적어도 자신을 작가로 자리매김한다면 사양함 없이 항상 과감하게 붓을 들고 써 내려가야 한다.

글감의 소재의 하나로서 인간의 삶은 복잡다기하기 이를 데 없다. 유교적인 개념으로는 4단(仁, 義, 禮, 智)과 7정(喜, 怒, 愛, 懼, 哀, 惡, 慾)이 교차하며 이루어지는 삶이다. 이런 삶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무한정한 이야기로 서술할 수 있으며 장르를 구별하지 않는 문학으로 전개가 가능하다. 그 많은 작품들이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고금을 통해서 보아도, 동서양을 살펴보아도 사랑은 지고의 주제이며 실현해야 할 가치 덕목인 만큼 이를 문학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 현대에 이르러도 변치 않고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글감이다. 이를 어떤 형식으로 전개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장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이루어나가는 본원인 인체를 탐구해 보면 이는 신비 그 자체이다. 이렇게 신비로 쌓인 인체에 관하여 어찌 노래함이 없겠는가, 문학의 원천은 인간의 사고, 생각에 있으며 이를 끌어안아 담고 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에서는 외형, 형식, 형태인 몸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의학적으로 살피거나, 생리해부학적으로 살피거나, 심리학으로 분석하거나 종교 신앙적으로 살피더라도 분명코 몸과 마음의 2중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인체 구조는 몸(身)과 마음(心) 또는 육체와 영혼이 적절하게 긴장하는 역동적 관계 아래 조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화와 균형 상태의 변형은 질병 상태로의 돌입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심신 즉, 영육의 적절한 긴장 관계의 평형 유지가 건강상태이며, 불균형 상태는 곧 질병과 연계하는 것이다. 인간이 탐구하는 지성 이상의 신비는 감탄, 영탄으로 맞이하는 노래의 대상이 되기에 족하며 달리 말하면 문학적 소재이기에 틀림없다. 이같은 의학적 심리학적 사실에 바탕을 둔 문학은 전문성을 인정받는 독창적인 영역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인간의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천체의 자연현상이나 동식물의 존재와 그들의 생존도 역시 미적 탐구 영역이며 아울러 감상의 대상으로서 문학의 소재이다. 2010년, 2011년의 세계적인 이슈로서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구제역의 참상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서는 도대체 할 짓이 못 된다는 토로(吐露)가 나오고 있다. 그 일을 담당했던 사람들까지 죽음에 이른 경우가 허다함은 형언의 도를 뛰어넘는 일이다. 가금류에 발생하는 조류 인플루엔자를 포함하여 생매장과 도살 처분된 소와 돼지 등의 숫자가 700만을 넘어선다는 통계이니 이는 세기적인 재앙에 틀림없다. 멀뚱한 눈으로 영문도 모른 채 구렁텅이로 떨어져 내려야 하는 육중한 동물들이 토해내는 핏방울들은 이제 땅 위로도 솟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지옥을 빠져 나가려는 울부짖음, 하늘을 찔러대는 그 괴성, 할퀴어 찢어지는 연약하기만 한 하얀 비닐, 아비규한의 현장이 넘쳐나고 있었다. 

동물도 인간과 같은 인식 능력, 지성이나 감성이 있느냐 하는 탐구는 어차피 인간 중심의 연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여하간 범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직간접적인 경험을 성찰하고 이를 언어로 정리 작업하는 문학 작가들이 어찌 한가로울 수 있겠는가, 글을 써라, 

우주 천체로 눈을 돌리면, 높은 하늘에 떠있는 달이나 태양마저 작은 먼지로 비유되는 천공 세계에 눈을 돌리면, 우리 인간 존재가 진짜로 미미함을 터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깨닫는 가운데 또다시 지성의 나래를 무한천공으로 치닫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기껏해야 별 10여개 내외로 되어있으며 지구와 태양을 포함하는 이 은하수는 2000억개 이상의 수소 폭탄 같은 화염 폭발을 계속하는 별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차린다. 감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감탄은 문학으로 승화되어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다. 그 노래들은 그침이 없다. 알퐁스 도데는 아름다운 ‘별’로 노래하여 잔잔하면서도 여린 꽃사슴 같은 사랑을 동경하게 하고, 또 우리 가슴에 안겨 주고 있다. 정지용은 ‘유리창’ 한 구절에 반영하여 또 다른 인간 심성을 증언하고 있으며, 윤동주는 ‘별 헤는 밤’으로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성찰을 노래하였다. 

자연은 끝날 수 없는 감탄의 연속이다. 작가에게 자연은 대단한 문학 작품의 소재이다. 어찌 글감 부족을 논하며 한가로울 수 있겠는가, 작가여, 글을 써라, 

 
Ⅲ. 작가는 우선 글을 써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서 작품을 전개해 나가면 된다. 이전에는 결코 사용된 적이 없었던 문자를 동원하여 작품을 전개해야 하므로 특출한 창조 과정인 것이다. 무한히 널리어 있는 글감을 동원하여 생명력을 부여하며 미의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따라서 작가는 전무후무한 창작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물론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일은 작가와 일반인의 공통적이고 잠재적인 희망에 속한다.

작품을 산출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평가를 우선 생각하여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평가는 작품을 쓰고 난 다음에 이뤄지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쓰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평가가 두려워서 글을 안 쓴다면 평생 작가로 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나 비평은 종속변수이며 창작은 독립변수이다. 작가의 창작이 먼저였으며 평가는 후순위, 종속변수이다. 

어느 나라이건 언어나 문자 생활이 먼저 일어났으며 문법은 나중에 체계화한 것이다. 문법에 정확한 언어 문자 생활은 훨씬 이후의 일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인간의 삶에 관하여, 자연 사물에 관하여 자신이 경험한 바를 문자로 재창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만 가지 사물을 음미⁃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글로 표출하는 것이 작가다.
이러한 위업을 담당하는 작가는 바빠야 한다. 바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글을 써야 하며 글을 써야 작가다.
문학은 영원하고 글감은 무궁하다, 작가여, 글을 써라.

플러스코리아의 큰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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