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의사 순국 79주기 추모에 즈음해서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정기 의사, 왜 그럴까?[민족역사 플러스코리아]박종호 고문= 백정기·이봉창·윤봉길 독립애국지사는 우리나라 ‘삼의사‘ 이시다. 그러나 백정기 의사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혹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은 누구나 갖고 있으리라 본다.
다행히 본인이 고문으로 있는 민족·역사·통일 신문인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에서 이번에 치러질 순국 제79주기 추모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알릴 예정이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나이도 구순을 넘기면서 뒤돌아보면, 그동안 올바른 민족 계몽운동과 역사 정립운동을 수 없이 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올바른 역사정립이나 민족운동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이번 순국 추모제에 본인도 참석하여 백 의사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고자 이글을 바친다. 구파 백정기의사는 1919년 서울에 올라와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 故鄕에 돌아가 同志들을 糾合하여 日帝와의 武裝鬪爭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仁川에 있는 日本軍 시설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폭로되어 滿洲 奉天으로 亡命하였다. 그 후에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국내의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뒤 주로 北京을 중심으로 李會榮· 柳子明· 李乙奎·申采浩 등 愛國志士들과 자주 접촉하며 獨立運動을 계속하였다 이때 이회영· 신채호의 영향으로 無政府主義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3년 9월 중국 湖南省 洞庭湖 근처에서 無政府主義가 追求하는 理想的인 農村社會建設에 참가하였다. “<1923년 당시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日本天皇을 비롯한 皇室 要人들을 일거에 폭살시키려다 불발되었던 朴烈 烈士의 義擧가 있었다. 또한 朴烈은 일본법정에서 裁判審議를 거절하여 일본사회를 분노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으며, 死刑囚로서 수감 중에 있을 때 일본여자 ‘가네고문자’와의 獄中結婚 등등은, 일본사회를 흥분과 공포로 몰아 떠들 썩 하게한 대한 남아의 기개가 충천하여 의기가 양양할 때 이였다.>” 1925년 上海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無政府主義者들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만 명 단위의 대노동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8년 5월말에는 아시아 각국의 無政府主義者들이 모여 결성한 (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韓國代表로 참석하였다. 1930년 北 滿洲로 가서 북만주의 있는 ‘韓國無政府主義者聯盟’의 동지들과 ‘自由革命者聯盟’ 이라는 秘密決死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1931년 9월 한국· 중국· 일본의 無政府主義者들이모여 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 요인사살· 친일파숙청 등을 목표로'(BTP)'라는 黑色恐怖團을 組織하여 排日運動을 전개하였다.
필자 일손(一巽) 박종호(朴宗鎬) 소개 ▲민족·역사·통일신문 플러스코리아 고문 ▲한 얼 역사정신선양연합회 총재 ▲민족중건총본부 명예총재 ▲(사)개천민족회 명예총재 ▲(사)한민족학세계화본부 명예총재 ▲(社)統一建國民族會 顧問 ▲韓國統一文化振興會 顧問 ▲(社)杏村(李嵒)學術文化振興院 顧問 ▲(社)統一建國民族會 顧問 ▲韓國統一文化振興會 顧問 ▲檀君團 總裁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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