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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의사, 동학혁명의 유적지 탐방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13/06/07 [11:07]

백정기의사, 동학혁명의 유적지 탐방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이형주 기자 | 입력 : 2013/06/07 [11:07]
▲ 동학혁명 전봉준 장군의 고택에서. 좌로부터 리복재 시인, 곽형주 정읍향토사학자, 박종호 상임고문, 김순영 발행인, 박기섭 통일운동가, 뒷줄 권오양 시민운동가     © 최정연 기자

[정읍 플러스코리아]이형주 기자칼럼=  대한민국의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중 한 분인 항일 애국투사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 제 79주기 추모식을 엄숙하게 거행한 후, 본지 기자 등 9명은 백정기 의사 및 동학혁명 정신을 배우고자 정읍 향토사학자 곽형주 선생의 안내를 받아 관내유적지를 탐방했다.
 
의사 백정기의 행적을 찾아서


 
가장 먼저 들른 것은 백정기 의사의 생가가 복원된 정읍시 영원면 앵성리였다. 이 생가는 백 의사가 영원면 갑부인 함양조씨 문중의 '팔락'낭자와 결혼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느낀 것은 백 의사의 숨어 있는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정을 버려야 하는 아픔,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서 받아야 할 탄압과 압제, 가슴에 저려 올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뼛 속 깊은 곳까지 찾아들 회한을 견뎌야하는 슬픔을 어찌 감당하려고 떠나야 하는가....
 
그러나 그는 이를 감수하기로 결정하고 떠난다. 갑부의 사위가 되어 금의옥식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생존하는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감수하면서까지 떠나야 했다. 안중근도 그랬고 독립운동가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민족자주와 자존을 되살리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백 의사는 동학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반외세, 반봉건, 민족자주와 자존을 내세운 동학혁명. 이 혁명은 일제와 매국노들에 의해 미완으로 끝났지만, 백정기는 혁명지에서 태어나 성장과정을 통해 현장을 눈으로 보고 주위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이후 독립운동을 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이회영, 김구, 신채호, 김좌진, 이정규, 백정기 선생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군의 요체 '아나키스트'를 거국적으로 결성하게 되었다.
 
▲ 동학혁명 기념관에서. 본지 박종호 상임고문과 고 장준하 선생 큰 자제인 장호건 선생이 기념관 관계자로부터 동학혁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최정연 기자

의사 백정기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향리인 정읍으로 내려와 만세시위를 선도하였고, 동지들과 서울, 인천을 오가며 일제기관의 파괴와 방화, 요인암살 등을 계획하다 일경의 추격을 받고 그해 8월 중국 봉천(奉天)에 망명하게 된다.

1924년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은신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침략 원흉인 일왕 처단과 수력발전소 파괴 등을 계획하였으나 갑자기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뜻을 못이루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북경에 온 의사는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선생등과 함께 더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1924년 6월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에 가입하였다.
 
의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고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 기치하에 통일 단합하고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공동투쟁하여야 된다는 연대항쟁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된 이 연맹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의사는 중국동지들로 조직된 남화(南華) 청년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1925년 7월의 일본, 영국 두 나라 자본가들을 상대로 유명한 상해(上海)파업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더불어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동원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1927년 여름 농촌의 자치자위(自治自衛)운동을 한·중·일 3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게 된다.

의사는 이정규(李丁奎)와 정화암(鄭華岩) 동지와 더불어 복건성 천주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福建城 泉州市 民南 25縣 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직화에 힘써 그 조직이 수천명으로 커지자 토비(土匪) 및 공비(共匪)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南京)에서 동방아나키스트동맹이 조직되었는데, 백 의사는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폐결핵 걸린 동지를 구환하다, 폐결핵으로 쓰러진 백정기 

▲상하이 '육삼정' 의거 직후 중일 경찰에 피체되었을 때 백정기 의사. 자료사진에는 백구파로 나온다. 백 의사가 구파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붙인 것으로 판단.

의사는 기관지 『동방(東方)』의 편찬위원으로 활동 중 폐결핵을 앓고 있는 동지가 있었는데, 자신들에게 병이 옮길까봐 아무도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 그러나 백정기는 지체없이 병든 동지를 자신의 거처로 옮겨 병수발을 들며 최선을 다해 구환했.
 
결국 의사 자신도 폐결핵을 얻어 쓰러졌다. 동지들은 백 의사를 살리기 위해 보다 큰 병원인 북경으로 옮겨 전문적인 치료와 요양을 하게 했다.
 
의사 백정기는 요양하는 중에도 동지들과 같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또한 1930년 길림성 해림시(吉林城 海林市)로 가서 김종진(金宗鎭), 이강훈(李康勳)등과 같이 김좌진(金佐鎭), 이을규(李乙奎) 등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재만한교(在滿韓僑)의 조직강화와 혁명사상 최고에 전략하는 한편 독립운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반동분자의 구축과 일제의 주구 색출에 적극 노력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북경을 거쳐 상해로 들어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산하 단체로 남화구락부(南華俱樂部)를 두는 한편 중국인 동지들과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한-중 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의 실행을 위해 행동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른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일명 BTP(BLACK TERRORIST PARTY)라고 불리었다.  흑색공포단은 토의 후 곧장 실력행사에 들어가 곳곳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 파괴하였으며 특히 천진(天津)에서는 중국인과 백 의사, 이강훈, 원심창(元心昌) 등과 같이 일본의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일본군함 일만톤급 1척을 대파시키는 대전과를 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었다.

1933년 의사는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내의 육삼정(六三亨)이라는 고급일식점에서 일본 군부의 거물들이 중국의 군별들과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즉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荒木貞夫)가 주중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에게 미화 2천만불 상당의 거금을 주어 중국 국민정부내의 附日分子와 고급장성을 매수하여 항일유격대와 독립군을 탄압시키고자 그 회의를 1933년 3월 17일에 연다는 것이다.

연맹은 곧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참여할 대원을 뽑았는 바 의사는 강력히 요청하여 이강훈, 원심창 의사 등과 같이 3인이 육삼정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을 만들고 왜적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만들었다.

폭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때 사용되었던 것과 동형으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 주석이 주고 간 것으로 사용하고 투척연습과 현장확인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거사당일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음식점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이미 변절자에 의해 밀고되어 급히 밀어닥친 일·중 합동경찰에게 거사직전 체포되어 상해에서 취조를 받은 후 같은해 7월 5일 일본 장기(長岐)로 압송되었다.

백 의사 등은 장기지법(長岐地法)의 판결을 받았는데 백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 이강훈 의사는 1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백 의사는 1934년 6월 5일 적의 땅인 일본의 감옥에서 폐병이 악화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아나키스트가 무정부주의자인가?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이 나라에서는 아나키스트에 대해 이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승만, 박정희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의 이념의 산물이다.
 
일제가 식민지배 및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항일저항 및 투쟁으로 일관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분열시키고 제압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무정부주위자'로 만들어 놓은 덫이라는 것을, 광복 후 국민들에게 교육시키지 않는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백정기를 지워버렸다. 아예 교과서에도 삭제해 버렸다. 대한민국 삼의사 중 한 분인 백정기의사를 위정자들인 국가 수반들이 내다 버린 것이다.
 
이는 아직도 진정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슬프고도 심란한 국가와 국민이 돼버렸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고 있다. 일제에게 충성했던 친일파들의 세력은 우익으로, 우파로, 보수로, 둔갑해 민족반역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라는 것만 밝히고, 이후 칼럼으로 정확한 맥을 짚어 올바르게 전달하겠다는 본지 칼럼니스트의 글이 이어져 나올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이만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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