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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부터 탐라까지 4천리 '대한국 영토' 인식

"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김민수 홍보국장 | 기사입력 2008/12/19 [15:08]

말갈부터 탐라까지 4천리 '대한국 영토' 인식

"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김민수 홍보국장 | 입력 : 2008/12/19 [15:08]
▲ 고종 황제의 어진    
대한제국은 고종황제가 한반도,간도와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삼대(三代)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대한(大韓)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우리나라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원래의 삼한(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다.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한 후 경운궁으로 환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이어 낮 12시에 황후를 책봉하고 오후 2시에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짐(朕)이 생각건대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이다. 태조(太祖)께서 용흥하는 처음에 여도(輿圖)로써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만주,연해주)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국(耽羅國: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풍부한 여러 해산물을 공(貢)하는 지라. 폭원이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거늘 오직 짐이 부덕(不德)하여 여러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상제(上帝)께서 돌아보시어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시니, 금년 9월 17일(양력 10월 12일)에 백악(白嶽 북악산)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 것이라 천명하였다.

▲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    
1904년 2월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1909년 만주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커피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대안문 앞,기념비전 앞 전국적인 규모의 '3·1 독립만세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양위를 당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 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신한혁명단'에서 고종황제를 망명시켜서 항일운동을 활성화 할 계획도 드러났고, 더구나 고종황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조선총독부,경성제국대학으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연구기관,문화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에서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되었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가 총독부가 수집한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매장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었다.
 
▲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총독부는 백악산 북원에 총독관저를,건청궁에 총독부박물관을,흥례문에 총독부를,환구단에 철도호텔을,목멱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고 통감부 조선신궁을,경희궁에 일본인학교를,창경궁에 동물원을,경운궁 궁내부 원수부 인화문 대안문을 철거 이전하고 경성부를 악의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미술관 철거,고궁박물관 경운궁 분관 개관하고 황궁우 석고단과 경운궁 대안문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여 환구대제,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황실사무청,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전적 고문서 미술품을 중점보호하고 황실문화재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을 철거하고 경운궁 궁내부 원수부 선원전 인화문 경복궁 의정부 한성부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의금부 돈녕부 종친부 사간원 소격서 승정원 홍문관 춘추관 육조 북원 인경궁 체부청 광화문 경희궁 융복전 회상전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돈의문 숭례문을 복원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제국주의 국가로 불법 반출 후 환수 또는 교육기관·기록기관·연구문화기관이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고문서·고지도·사진 등 황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제실박물관,황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국내외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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