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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원, 한민족국가의 역사 요약-상고시대~고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3/04/12 [09:06]

민족시원, 한민족국가의 역사 요약-상고시대~고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3/04/12 [09:06]

[홍익 통일 역사=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역사전문위원= 현생인류의 문명생활은 대략 마지막 빙기(빙하기)가 끝났다고 하는 약 12,000여년 전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대부분의 서양사관적인 입장에선 그 후로도 약 6,00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메소포타미아지방을 중심으로 문명다운 문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한민족의 민족적·문명적 기원은 무려 만여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게 맞다. 그것은 즉, 마지막 빙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민족의 선조들이 문명생활을 시도하여 성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여년 전에 아시아의 북부지역을 거의 대부분 포함했던 수만리 강역을 가졌던 환국 12연방(환국을 한국이라고도 함)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우리 한민족에게는 전해져왔으며, 그 나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자료들도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3301년간 존속했다는 환국의 문명은 그 말기에 지구적인 대 기상이변을 당하여 대부분이 시베리아의 동토밑에 갇혀버리고, 살아 남은 주민들은 사방으로 퍼져갔다고 하며, 지금으로부터 6,000여년 전에 갑자기 여기저기서 동(同)시대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위 세계4대 문명은, 바로 그들 한국의 이주민들에 의하여 비슷한 형태로 옛 환국의 주변부를 따라서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환국의 3,000부락(단부)을 이끌고 삼위와 태백사이의 너른 평야지대로 민족적 이동을 단행한 환국의 후계자인 배달환웅은 현재의 하북·산동·만주·연해주·한반도 등에서 살아 온 한민족의 직접적인 선조격이 된다고 알려져 왔다. 동아시아의 기록들에 의하면 소위 중국한족(中國漢族)이라고 불리워 온 화하족(華夏族)이 동아시아에서 역사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들의 선배격인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이 찬란한 고대문화를 이룩하고 있었고, 원시생활을 하던 화하족에게 문명생활을 가르쳤다고 한다.

▲ 황하문명보다 일천년이나 앞선 홍산문명(요하문명).     © 편집부



  그리고 화하족들의 고대제왕들인 삼황오제 이하 숱한 지도자들이나, 중국지방에서 역사활동을 전개한 많은 국가들도 동이족 계통이라고 하는데, 동이족이 다름 아닌 우리 한민족의 옛 명칭중의 하나였음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중국지방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은 우리 한민족의 오랜 활동무대였으며, 소위 중국문명이나 일본문명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한민족문명의 아류 내지는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도 지금은 별로 비밀이 아니다.

  1565년간의 신시시대와 2095년의 단군조선이 펼쳤던 역사활동에 관한 기록들의 대부분이 최근의 활발한 고고학적·문헌고증적 연구들에 의하여 신화와 설화의 세계로부터 사실의 세계로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논란이 분분한 상고사의 분야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 역사적 가능성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록이 확실하다고 세계적으로 공인되어 온 단군조선 이후의 역사인 삼국시대 역사만 훑어 봐도 불과 1,30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민족의 위세는 동아시아를 진동시키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 오호십육국 중에서도 배달민족의 큰 갈래인 선비족 계열의 국가들이 매우 강성했었음을 참고해야 할 것임. 즉, 삼국만을 우리 민족이 활동범위에 넣어 온 경향에 대한 큰 수정을 요함 *

  고구려의 다섯번째 임금인 모본황제때 이미 산서성 지방까지도 한민족의 활동무대였으며, 그 후 수백년간의 전란시대인 소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도 한민족국가(특히 고구려와 백제)들은 단군조선 이후 그 소유권이 불투명했던 중원지방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재구축했으며, 오호십육국 말기에 일어난 수·당 등의 중원지방 통일국가들도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대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나라 병력은 200여만의 대군이었고, 당나라병력도 30여만이나 되었는데, 이러한 대공방전들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들이었다. 백제는 특히 왜열도 개척에 크게 힘을 써서 열도의 역사전개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삼국 중에서 패권을 노리던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족국가인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고구려는 다시 옛 터전인 만주와 연해주·동부시베리아일대에서 대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융성하였고, 고구려의 변경부족이던 거란·말갈 등이 그 후에도 대요·대금·대청 등을 세우며 고구려의 유풍을 다수 계승해간 데 비하여, 백제는 그 근거지를 변방인 왜열도로 완전히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후 왜열도의 후계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은 원한으로 응어리져 남았으며, 왜구들의 잦은 준동과 임진·정유왜란·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탈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대진국과 신라사이에는 큰 전쟁은 별로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었다는 증거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동족간 상호불가침'이라는 묵계 하에 각각의 사회적 발전을 꾀하며, 최소한의 용도 내에서만 인적·물적 교류가 오간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은 250여년간의 번영을 누리는 동안 해동성국(海東盛國:즉 발해만 동쪽의 융성하는 나라)의 명성을 누렸고, 신라는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으로 한 때는 황해연안일대(중원지방 동부일대 포함)에 최대의 세력을 구축했고, 왜열도에서도 수차례의 대내·대외적인 소규모 전란을 제외하고는 후일의 도꾸가와막부 시대와 비교될 수 있을 법한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 유명한 대외활동을 펼친 한민족의 영웅들은 현재의 신강성 지역을 호령하며 이슬람군의 동방침략을 막아낸 고선지장군, 산동·절강·강소 등의 황해연안 주요부를 장악하여 60여년간 독립적인 역사활동을 펼친 이정기 절도사의 제(齊)나라, 그후에 역시 황해연안과 왜열도 서부지방까지의 남해영역에서 대규모해상세력을 발전시킨 장보고 등이다.

▲ 홍산유적지에서 발굴된 단군조선시대 청동 유물들.     © 편집부


  신라는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풍요를 구가했으나 부와 권력이 점차로 편중되어가다가, 한민족사회에 일찌기 없던 극심한 빈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소위 귀족층과 지방호족층은 거대한 부를 소유한 반면에 수많은 양민들이 농토를 저당잡히고 소작인화하였다. 그러한 사회적 모순이 증폭되어가자 농토를 잃고 유리걸식하던 무리들은 작당하여 대규모 비적으로 돌변하기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궁예의 후고구려(태봉)와 견훤의 후백제가 신라의 중앙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른바 후삼국시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는 엄연한 고구려의 진정한 후신인 대진국의 역사적 활동을 염두에 두지 않은 용어상의 모순때문에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혼돈상태로 몰아 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대동강남쪽에서 후삼국이 쟁패전을 벌릴 무렵에 대진국은, 서쪽 열하고원 지방의 변방부족으로서 혼란에 빠진 중원지방(오대십국)의 약세를 틈타 급성장한 거란의 급격한 대공세를 받고 당시의 도읍인 상경용천부(영고탑부근)가 어이없이 함락당함으로써 황통(皇統)의 일시적 단절이 초래되었다. 거란은 대진국 영토에 동란국(동쪽의 거란)을 선포했으나, 실제적인 통치능력이 미치지 못한 데다가 즉각적인 대진국 국민들의 격렬한 항쟁에 부딪쳐서 불과 2년여만에 동만주 일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간신히 서압록(지금의 요하) 동쪽의 요양만을 지키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진국의 유민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한 갈래는 대진국의 동쪽절반을 일찌감치 회복하였고, 한 갈래는 당시 신라로부터 양위받은 고려와의 접경인 대동강 이북·동압록 이남(즉, 지금의 평안도지역)에 대거 몰려와서 고려의 후원하에 거란에 대한 항쟁에 적극적으로 선봉에 섰다가 후일에 고려에 동화되었고, 대진국 서부지역이던 서압록(현재의 요하) 동쪽에서 동압록 서쪽 지방에 거주하던 대진국인들은 거란의 폭거에 굴종하고는 있었지만, 거란의 세력이 약해질 때마다 불사조처럼 항쟁을 되풀이하였다.

  거란은 자신들의 세력판도 내에 있던 대진국인들을 숙여진(熟女眞), 거란과 대립·항쟁하던 대진국인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고 일컬었다. 생여진의 땅인 대진국 동부지역에는 정안국·오사성발해국(定安國·烏斯城勃海國)등이 건설되어 거란과 끈질기게 맞섰다. 고구려의 옛 강토 회복을 목표로 내건 고려가 군비를 강화하는 한 편 대진국 후속국가들을 지원하여 거란을 곤경에 몰아 넣자, 고구려 옛 강토의 서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거란의 성종왕은 마침내 국운을 걸고 고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세차례에 걸쳐서 수양제왕의 침략군과 맞먹는 총130여만의 대군을 일으킨 거란은, 간신히 텅 비어있던 황도(皇都) 개경까지 단 한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 뿐으로 수십만 대군이 몰살당하는 등 참패를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란은 국력을 통째로 기울인 고려침공에 실패함으로써 내분(內紛)이 치열해지며 급속히 약화되었고, 마침내 생여진의 아골타가 일으킨 대금(大金)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말았다.

  거란에 대항하던 모든 대진국인들에게 동종론(同種論)으로 민족적 동질성을 깨우쳐 주면서 고구려의 후예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은 아골타의 대금국은, 거란은 물론 중원지방의 송나라 왕실까지도 회하(淮河) 남쪽지방으로 밀어내어 버리고, 몽골지방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비단길까지 그 판도를 확장했다. 명실공히 광개토대제 당시의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재현한 대금국은 고구려의 정통을 이은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며, 남송을 비롯하여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게 복종과 조공을 받아내었다.

  고려는 일찌기 아골타의 근거지였던 동만주의 완안부(完顔部:"王"의 뜻이라고 함) 여진을 정복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적이 있었으나, 여진의 신종(臣從)서약을 받고 그것을 되돌려 준 적이 있었으므로, 고려인들은 급성장하는 위세로 고려에 대해서도 신종을 요구해 온 금나라의 조처에 크게 반발하였고, 그에 따라서 금을 쳐서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가 누구인가를 가리자는 국선파(國仙派)와 굴욕적이더라도 전란만은 피하자는 사대파(事大派)로 나뉘어 대립한 끝에 사대파가 득세함으로써, 고려와 대금은 불평등한 조건하에서나마 그런대로 평화공존을 누릴 수는 있었다.

  당시의 세력차이로 볼 때, 고려는 이미 이백여년 지내오는 동안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나 오랜 태평으로 대부분의 국민은 불필요한 전쟁을 원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고, 대금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당시의 전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만큼, 동족간의 상쟁이라고 볼 수 있는 대금과의 전쟁은 일부러 일으킬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당시에 세부득이(勢不得已)하여 스스로 취했던 사대정책이 그 시행자들인 김부식 일파의 자기합리화를 위하여 과대하게 평가되어, 한민족의 옛 역사 자체가 모두 사대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왔다는 식의 왜곡된 시각과 결론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던 점이다. 그러한 자기비하적 자기합리화의 대표적인 이론서가 다름아닌 삼국사(三國史)이며, 현재까지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국내·외의 간악한 무리들에 널리 악용되고 있는 근거 자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을 명확하게 민족주체적으로 하여 상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삼국사의 서술 내용만으로도 한민족의 위용을 잘 알 수 있다.)

  중원지방까지 다시 통치권을 확립한 여진인들은 그 지방의 통치에 유리하도록 자신들의 고유한 기풍과 제도 등을 그 지방의 사정에 맞도록 스스로 고쳐 나갔다. 그러나 지나친 형식과 사치풍조가 만연되어 있던 중원지방의 풍습을 따라간다는 것은 부패와 부정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여진인들 스스로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고려에서도 안일한 사대주의의 만연으로 문신(文臣)들 중에서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사치·방탕에 빠진 오만한 권세가들이 발호하여 사회문제화되었다.

  일부 문신들의 오만은 극에 달하여 무신(武臣)들에게 모욕과 행패를 일삼는 자들마저 나타났으므로, 참다 못한 무신 정중부는 일대 반정을 시도하여 그 처신상에 문제성이 많던 문신들을 일망타진하고, 이른바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무신들간에도 수차례의 세력다툼이 벌어진 후에 최씨일가에 의한 4대에 걸친 장기집권이 시행되었는데, 바로 그 기간 중에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몽골족의 대공세를 맞이하여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몽골을 일으킨 칭기스·칸의 일족은 흑룡강 상류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인들의 한 부족이었고, 당시 금나라의 지나친 고압적 횡포와 유목부족들간의 치열한 내부분쟁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몽골지방의 유목민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한 후, 북아시아의 유목민들을 경멸해 오던 중앙아시아지방의 회교국가들과 중원지방의 패자(覇者)인 대금을 굴복시키려고 닥치는대로 살기등등한 정복전을 펼쳤다. 당시 지금의 중앙아시아지방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코라즘의 술탄이 몽골사신들을 첩자로 몰아서 잔인하게 처형해 버린 것은 몽골인들을 크게 자극하여, 그 후 벌어진 몽골의 이슬람제국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에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코라즘을 정벌한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공략하는 첫 순서로서 감숙지방의 탕구트(서하)를 먼저 정벌했고, 이어서 남송과 동맹하여 금나라를 포위 공격했는데, 그와 함께 동쪽의 우환거리로 여겨진 고려에 대해서도 조공을 강요했다. 고려는 물론 즉각적으로 이에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서 몽골의 침략을 자초하게 되었다. 거란의 수차례에 걸친 대공세도 격파했던 고려인들이 일개 소수부족인 몽골족에게 순순히 항복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몽골족의 침략에 대한 고려인들의 항쟁은 세계사상 가장 빛나는 항쟁기록의 하나가 되었다.

▲ 한민족의 홍익인간이념은 세계주의 이념으로 모든 인류을 차별하지 않는다. 아메리카로 건너 온 청교도인들이 인디언 1억여명을 학살했는데 미국이 민주주의를?     © 편집부


  거의 모든 국민들이 산성과 섬으로 피신한 채 일체가 되어 야만적이고도 맹목적인 몽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고려의 의로운 항쟁은 모든 침략을 물리쳤으나, 극심한 국력의 손실로 말미암아 몽골과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강화조약을 맺는 것으로 대몽항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세계를 거의 다 석권했던 몽골제국(원)의 점차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고려가 몽골족의 반식민지적인 처지로 떨어졌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몽골족의 압력에 의하여 오랜 평화관계를 유지했던 일본열도에 울며 겨자먹기로 파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사건은 그 이후 일본해적(왜구)들의 고려 및 조선에 대한 노략질에 항구적인 구실을 제공해주고 말기도 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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