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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게 속고 또 속는 바보나라 대한민국'(2)

그들 유일신 '하나님'이 아닌 '일본神'에게 몸싯고 세례받은 목회자..

리복재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08/12/29 [07:05]

'무디게 속고 또 속는 바보나라 대한민국'(2)

그들 유일신 '하나님'이 아닌 '일본神'에게 몸싯고 세례받은 목회자..

리복재 역사칼럼 | 입력 : 2008/12/29 [07:05]
 

[설명= 우리나라에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 오른팔이자 크리스찬인 일본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는 본국에 군軍 사기와 군율의 질서유지를 위해 종군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 전란 중인 1594년 크리스마스를 전후 포루투칼 선교사 신부 세스페데스 (Cespedes Gregorio de 1551-1611)가 웅천縣(熊浦城 곰개 Comangqi 1592 小西行長 축성. 일본 제2수군기지)에 유럽인 최초로 종군신부가 되어 들어 왔다<한국 천주교회사(p262-281 3장 세스페데스 신부의 입국 편)>.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민중들을 살육하는 장면을 철저하게 침략자 편에 서서 바라보았고, 허울 좋게도 조선 민중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장본이라고 생각한다.

참고적으로 좌측 사진은 여의도에 위치한 모교회 상당코너에 게재된 글과 사진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이끌었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張)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고니시와 왜군을 물리친 우리 조상들이 잘한 것이냐 잘못한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고니시가 순교의 피를 흘린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저희 조상들이 좀 더 신중을 기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상들이 잘못한 것 같다"는 답글이 남겨져 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을 이교도(사탄) 괴수라고 칭하고 '임진왜란 십자군 전쟁은 하느님께서 명하셨지만 중간에 신앙심을 잃으면 이순신과 같은 일을 당한다'라는 설명은 우리민족이 쓴 글이라고는 단정짓고 싶지 않다.  
 
침략하여 우리 민족을 살륙한 적장 고니시는 카톨릭을 믿었다면서  '순교자'요, 이들 침략자들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은 '사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이 교회측 관계자들의 입장이 나와야 할 것이다. 질문자가 일본인이라고 가정을 해도 답변을 준 상담자는 이 교회 측이기 때문이다. 관계자의 입장이나 반론이 나온다면 본지에서 기꺼이 게재할 예정이다. 더 이상 일일이 밝히지 않아도 독자제위께서는 이 게시물에 나와 있는 질문과 답변을 읽을 수 있으므로 판단은 자유이다. 記者柱]

<무디게 속고 또 속는 바보나라 대한민국>의 제하에 [민족적인 구심점(求心点)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가. 1편 일제잔재부터 청산해야]라는 칼럼이 보도되자 많은 독제제위께서 글과 전화를 해 주었고, 각 포털에서는 수 천개의 덧글을 달며 뜨거운 비판과 성원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부제목과 본문에 우리 민족의 신은 하나님(하느님, 한울님, 한님 등 이하 총칭)이 아닌데 왜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표기하려면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해야 옳다, 하나님은 기독교 등에서 부르는 신이다, 애국가도 처음 하나님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하느님으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종교인으로서 친일한 자들부터 밝히라...



잠시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리민족은 민속신앙인 ‘애니미즘(Animism)'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유기물과 무기물 또는 생물과 무생물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지만, 원시시대에서는 이러한 판별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물체에 정령(精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숭배하였습니다.

특히 하늘 위에 있는 태양이나 북두칠성, 고산주봉(高山主峰)과 같은 살아가면서 불가사의한 것에는 반드시 정령이 있다고 믿었고 그 정령이 우리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고 숭배하였습니다.

이후 우리 민족의 정령숭배는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이러한 정령들을 초월한 유일의 주재신(主宰神)을 인식하여 절대신은 하늘에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한울님. 하늘님’으로 부르다, 세상을 오직 하나이신 절대신(絶對神)이라고 하여 ‘한님. 하ㄴ.님.’, 후에 ‘한얼님(이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자어로는 ‘환인(桓因). 천신(天神). 상제(上帝). 천왕(天王), 천제(天帝). 천군(天君). 천주(天州)’ 등입니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일찍이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민족보다도 수 천년 먼저 인식했던 민족입니다.



▲ 일장기 말소사건,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손기정 사진 (왼쪽)과, 원래의 사진(오른쪽)이다. 지금의 동아일보가  일제식민지 때 민족정기를 세우려했던 당시의 민족적인 초심을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    

가까운 주변국부터 예를 들자면, 일본은 가미사마(神樣)라 하여 정령을 숭배했지만 ‘하ㄴ.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중국을 들자면 임금을 천자(天子)라고 불렀으며 그래서 중국인들은 하늘이 천지와 인간만사를 주재하는 최고의 신으로 알고 천자인 왕를 떠받들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창공의 자연현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브라만(Brahman)을 우주의 창조자라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당시 어느 민족도 창조주이며 주재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정령을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유태교나 기독교보다 수 천년 전에 인식하고 믿었던 창조주이고 유일신이며 주재자 하나님과 유태교, 예수교, 장로교, 카토릭교, 감리교 등(기독교로 총칭함)에서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은 같은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답변합니다.

앞서 대한제국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를 할 때 우리문화를 깊이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성서번역을 한 게일(Jamea S. Gale)과 클라크((C. A. Clark)인데, 기독교에서 신봉하고 있는 ‘여호와(기독신, 야훼신)가 고대 우리 민족이 인식한 하나님과 동일한 유일신이고 창조주이며 주재신’이라고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가 1800년대 후반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한민족이 유일신으로 믿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잡신(?)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내세우며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점에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교사 등이 쓴 ‘대한국의 종교, 고대 조선의 종교’등의 책 등 많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우리 민족은 그 훨씬 이전에 ‘아버지’이상으로서 존귀하게 믿었고, 기록으로는 조선 세종대왕 18(1436)년 김호연(金浩然)이라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世宗實錄 卷七十五 十八年十二月錄)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카톨릭이 전파되면서 조선의 하나님을 천부(天父) 또는 천주(天主)로 부르며 ‘천주교’로 자리잡아가고자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1860년 천주교의 ‘서학(西學)’에 반대하여 ‘동학(東學)’이라는 지금까지의 그릇된 인식이 팽배해 있는데, 이는 서학론자나 식민사관론자들이 서로간 대결과 갈등을 조장하고자 하는 의도된 것으로, 즉 동학은 해가 뜨는 동쪽에 위치한 곳에서 태고적부터 이어진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알자는 뜻에서 창도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학은 민족자존과 외세침략을 단호히 분쇄하고 전근대적인 혁명을 일으켰으며,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하나님을 대주재신으로 모시고 몸과 마음을 닦아 나라를 구하고 보국안민하고 모든 백성을 구제하자)’로 대외에 천명하기에 이릅니다.

1894년 전라도 고부(古阜 정읍)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견디지 못하고 동학의 접주(接主)인 전봉준(全琫準)이 ‘갑오동학혁명’을 일으켜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봉기하였으나, 친일파와 일제군사들은 동학을 뿌리채 없애기 위해 무려 30여만명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맙니다. 이후 동학은 이들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조국독립을 위해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각 종교지도자를 설득해 전국적인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지금의 동학은 천도교로서 그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고, 당시 미제와 일제의 의도대로 서양종교를 찬양케하고 전파하여 민족정신을 흐트려 놓은 결과의 산물입니다.

일제가 서양종교를 찬양하고 전파한 이유를 모르신다면, 지금의 일본인의 종교를 믿는 비율과 비교해 보십시오. 일본인이 서양종교를 믿는 것은 전체 4% 정도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토착신앙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빼앗기 위해 식민지배에 필요한 종교상(宗敎, religion) 목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정황상이나 객관적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은 선교사들에 의해 언어상의 속임수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번역의 실수였다’라는 점과, 우리 민족의 유일신인 하나님을 끼워 넣어 자신들의 목적(자신들과 전혀다른 신이지만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에 의한 인위적인 조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성경 구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아닌 ‘태초에 기독신(야훼신)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옳은 번역이라고 판단합니다.
 

▲ 1982년 당시 '예수에게 후손이 있다'라는 내용으로 각 신문에 기사화 된 것 캡쳐    


 
[사진 설명=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등)에서 보도(사진=1982.2.20자 동아일보 )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년 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될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으며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설명= 당시 미국의료원의 지원을 받으며 줄기세포국제특허를 출원했던 노성일과 함께 새튼은 대한민국 배아줄기세포원천기술을 도용하여 특허를 세계에 출원하고 세계줄기세포허브센타의 의장직을 요구했던 새튼의 특허강탈근거 도표. 미국정부는 새튼이 출원한 특허출원서에 특허지분에 대한 소유권을 명시하고 있다.

이후 황우석 박사측은 2006년 세계 26개국에 특허등록을 출원했으나 호주특허청이 특허등록 획득 전 서울대측에서 '1번 줄기세포(NT-1)'가 ‘처녀생식이라고 발표한 것과 관련 서울대에 어떻게 된 것이냐는 공문을 보내 서울대는 황 박사가 있는 수암연구소 측에 권한을 넘길수도 없고, 국가 연구비로 진행된 것이라 엄연히 국가 재산이기 때문에 표기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다고 언론은 전했다. 호주 특허청이 서울대측에 보낸 질의서 내용이다.

"일전에 서울대가 황우석 박사의 NT-1번을 우연히 만들어진 처녀 생식 세포로 발표하고 황박사를 데이터와 논문 조작으로 파면까지 하고서는 이제 와서 황박사의 연구 내용과 처녀 생식으로 주장했던 NT-1번을 인공 체세포 핵이식 줄기세포로 인정해 제작 방법에 대해물질 특허를 허가해달라는 출원을 했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만일 줄기세포 특허권이 호주로 넘어가게 되면 연간 수 백조원(추정가 최소 300조원 이상)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호주가 창출하게 되며, 애써 이룩한 우리나라의 인류사적 원천기술은 다른 나라가 차지하고 사장될 것은 뻔하다. 애초 세계 특종종교와 미국 그리고 국내 특정종교와 카르텔들의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황우석만 죽이기’라는 음모를 꾸며, 결국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미국은 새튼이 출원한 특허를 허가하지 않았고, 이는 세계적인 이목이 무서워 강탈할 명분이 잃었다는 것이 된다.]
 

▲ 시국보고회 때 성조기와 자신들의 교회를 상징하는 듯한 기를  흔들고 있는 모습   




 ‘한민족과 유대민족 간의 총성 없는 전쟁’

지금의 ‘좌우파진보보수민주개혁세력’의 문제점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들은 종교론적인 면에서 해매이고 있는 세력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좌파진보민주세력'의 노동자와 민중을 자칭 대변한다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어떻습니까? 반대로 ‘우파보수수구세력’인 민족주의자와 우리문화를 자칭 대변한다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어떻습니까? 이들 두축의 세력은 카톨릭과 기독교(개신교, 감리교, 장로교 등 많지만 통상 기독교로 함) 신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차후 종교적인 문제점과 종교지도자들의 만행에 대해서 밝히겠습니다.

필자는, 2005년 11월부터 황우석팀이 이룩한 ‘배아줄기세포원천기술’에 대해 ‘줄기세포 없다’라며 로마 교황청과 기독교에서는 신을 능멸하려는 짓으로 규정했고, 국내에서는 의사 의료계 특정종교 제약업계  민노당 등  수 없이 많은 수구기득권세력들이 난자 문제와 줄기세포 없다,라는 취지로 특허가 무산되고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사건화 하자, 2개월전부터 준비한 자료를 근거로 한민족이 이룩한 원천기술을 강탈하려는 ‘음모’라고 규정하고, ‘한민족과 유대민족 간 총성 없는 전쟁’ 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때 민노당 관계자들은 난자채취과정이 비윤리적이라는 문제를 놓고 노성일팀이 맡았던 것임에도 황우석을 죽이기 위해 일제시대 정신대(위안부)로 빗대어 연일 비난과 저질성 폭로를 하며 지지판에서 악성루머를 퍼트리고 ‘배아줄기세포 연구금지’ 당론과 당규정책상에 집어넣고 맙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종교가 깊숙이 개입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고, 더욱이 웃긴 것은 황우석 사건이 일어나기전 ‘성체줄기세포(서양종교에서 추진)’의 문제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체줄기세포의 문제점을 가지고 민노당의 태도돌변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겠습니다.
지난해인 2007년 2월 7일 임모(15세 여)양은 부천의 모중학교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다 팔에 심한 통증을 느껴 경기도 부천시 소재 순청향대학 병원에 내원해 팔이 골절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사고 당일 MRI와 골 스캔 검사를 통해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부상 50일째인 3월 29일 전신마취 후 수술을 받았으나 숨졌다. 사인은 심장 이상 증세로 사망했다는 게 병원 측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번 임양의 사망 사건에서 성체줄기세포 골수를 불법적으로 시술했다면, 이 사건의 내막과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003년 말 세포응용연구사업단의 문신용 단장과 관련, 간암환자에게 성체줄기세포로 치료하다가 2명이 죽은 것입니다.

성체줄기세포에 대해 민노당이 집중성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줄기세포게이트인 '황우석 죽이기' 사건 전·후 180도 돌변해 버린 민노당.

2003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 여러 명의 간경화 환자에게 성체줄기세포를 투입하는 불법시술을 해 2명이 숨진 사실을 식약청이 적발했다고 민노당은 대대적으로 밝혔습니다. 문신용 교수가 책임자로 있는 과기부의 세포응용연구사업단에서 상용화 되지 않는 성체줄기세포 불법시술로 2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서 집중 추궁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민노당은 공교롭게도 2005연 9월 28일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일부 인간배아 연구 불법적 진행, 문신용 32억, 노성일 수억등 계속 불법집행"을 하고 있다고 밝혀, 이전의 행동과는 180도 돌변하면서 1개월 후 ‘황우석 죽이기’사건의 전초전 양상을 띄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민노당은 종교와 수구기득권 카르텔들을 대변한다고 해야지 노동자와 민중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성체줄기세포와 배아줄기세포의 차이점

'10.4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는 단체와 특정종교 사람들이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설명=MBC라디오 시사집중2007년 10월 5일 미국 켄트주립대 정치학과 데니스 하트 교수는 손석히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MBC라디오 시사집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시위를 보고,
“왜 한국 사람들은 미국 국기를 흔들어야 돼요? 사대주의 표현이고 거기에 대한 짝사랑 보는 것 같은데요. 참 보기가 민망합니다. 남의 나라 정부가 이래라, 잘해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누구를 존경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 아무것도 없고 미국 사람들이 한국 운명을 결정해야 합니까? 지리산에서 농사지시는 한국인 친구가 저한테 가끔 이메일 보내 주시는데요. 정상회담 반대데모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요.”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성체줄기세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체내에 삽입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맞지 않으면 100% 죽는 것이고, 배아줄기세포는 자신의 세포로 만들어 체내에 삽입시키기 때문에 100%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배아줄기세포는 몸을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어 전분화능(全分化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줄기세포는 본래 자신이 있던 조직과는 성격이 다른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배아줄기세포는 세포배양을 통해서 쉽게 증식 시킬 수 있으나, 반면 성체줄기세포는 성숙된 조직 내에 아주 소량이 존재하고 있고, 세포배양을 통해서 성체줄기세포를 대단위로 증식 시키는 방법이 아직까지 개발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줄기세포는 어떤 기관으로도 분화 가능한 만능세포를 말합니다. 황우석 박사가 세계 최초로 인간의 체세포와 난자를 이용하여 배아줄기세포 획득에 성공했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서울대 조사위의 조작 발표의 문제점은 이미 낱낱이 밝혀 놓았습니다. 이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못한 불치병환자들의 치료에 이용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복제로의 활용에 대해 특정종교집단이 강력히 거부하여 의사, 성체줄기세포연구자, 제약업계, 민노당, 종교의 탈을 쓴 정치인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잠시 필자의 여담을 늘어놓겠습니다.
며칠 전 모정치웹진 기념식에 초청을 받고 참석했는데, 입장하자마자 ‘당신 황우석 얘기하지 마라’는 일갈이 터져나옵니다. 이 자리가 황우석을 주제로한 토론장도 아닌데 말문이 막혔습니다. 자칭 민주개혁세력이라고 하는 분들 중에서 터져나온 이 말에 쓴 웃음을 짓게 했습니다. 사건은 이후 본격적인 의제를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시간에 터져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민주화와 개혁을 외친 투사들의 희생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이 지금 이데올로기이념이 재판되고 있고 모든 방면에 걸쳐 심각한 사회병적인 요소가 난무하는 시대에서 울분이 쌓여 차라리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의견도 터져 나오고 인터넷에 글도 쓰지 않겠다는 의견 등 많은 의제가 나왔습니다.

필자는 개혁의 외침이 너무 조직화되지 못하고 일률적이고 단편적이어서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소지가 있다, 이는 민족적인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의견을 표출하는 가운데, 처음 입장할 때 '황우석 이야기 하지 마라'는 사람에게서 심한 야유와 비난을 마디마다 들어야 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고 이해를 구했고, 몇분이 제지하였지만, 이런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자칭 민주개혁자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만 들었습니다.

이후 자리가 끝나갈 즈음 필자에게 야유와 비난을 보냈던 황우석 비난론자는 나가면서 제 얼굴이마를 손으로 치는 행동을 보여주고 사라졌습니다. 잠시 멍멍해졌습니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주위 분들이 말려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게 민주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의 행태인가, 차라리 X새끼들이라고 해라...’고 쌍욕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황우석의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황우석을 지지한다는 것도 좋고 성원한다고 해도 좋지만, 단군국조 이래 황우석팀이 이룩한 대한민국 원천기술은 세기을 넘어 온 인류가 무병장수를 갈구하였다는 사실적 객관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루어줄 수 있는 인류사적 최고의 발명입니다.

황우석팀(세금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대한민국팀으로 명명함 )이 이룩한 줄기세포 원천기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특허를 지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필자와 배아줄기세포 연구허용을 외치는 시민들이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특허를 강대국인 미국과 특정종교에게 갖다 바치려는 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쁜것입니까?

▲  김구 선생과 안중근 장군을 살인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유관순 열사는 여자깡패라고 망언하고 있는 광주민주운동 유공자 김완섭.    




여호와(Jehovah)는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신(神)!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초창기 민족신은 “엘(El)”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Mose)”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합하여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민족해방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신의 이름을 여호와(Jehovah)라고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호와”에게서 조상 전래의 하느님을 재인식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여호와(Jehovah)는 창세기 첫 장부터 나오지 않고, 출애굽기에서 부터 (구약성서 3:15) 등장한다. 여호와(Jehovah)는 유대민족의 전쟁신이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복수하도록 지시한 자가 바로 여호와이며 (출애굽기21:23-25), 끔찍한 살인을 예사로이 지시하고, 여인을 강제로 탈취하여 동침까지 한다. (민수기 31:25-40). 여호와는 사람까지 죽여서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고, 유대민족에게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할 것을 지시하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신(神)이다. (사무엘기상 15:2-3, 신명기 17:2-5, 19:1, 민수기 15:32-36, 출애굽기 21:20-21, 22:18, 22:20, 레위기 20:27).“


‘하나님(기독교에서의)을 배척하고 부정한다’는 말을 필자에게 퍼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지는 과거청산에 대해 말할 때 각 종교의 종파주의자들의 만행에 대해 스스럼없이 비판한 것에서의 연유(緣由)입니다.

'불교 전파를 위해 우리 민족이 유일신인 하나님를 믿고 단군국조를 섬기는 것에 착안해, 절을 지으면서 대웅전(大雄殿)이라하여 부처상을 놓았으나 단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속이고 있고, 삼성당 또는 삼신각은 환인 환웅 환검을 모시는 자리로 꾸미는 것으로 알고 우리 민족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일제의 불교도들은 조선침략을 위해 일제군국주의자들에 적극 협력하여 수백만명의 사상자를 내도록 도왔으며, 일제 때 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종파주의자들이 얼마만큼 민족반역짓거릴 해댔는가, 카톨릭은 안중근 장군의 영세명인 '도마'를 침략자인 이또 히로부미를 죽이자 제명시켰고, 이후 광복 후에도 복권을 안하다가 민주화바람이 거세게 불자 90년대 복권시켜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망명해 일반인과 결혼하여 후손까지 두었다...'

이렇게 말하자 유독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부분과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에서 강하게 부정하며 ‘거짓말’이라고 말했고, 나중에 예수가 후손이 있다는 증거를 들이 밀자 ‘그런 적은 것(사소한 것)을 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느냐?’하고 강하게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발신제한표시로 온 문자를 보면, 공공연한 '하나님(기독교)' 이미지의 훼손은 님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등, 비난은 더욱 거세어 졌습니다.

참고로 필자는 어렸을때부터 기독교를 믿다가 성장하여 불교와 카톨릭을 믿었던 사람이었으며 무종교입니다. 현재는 동학과 원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으며, 우리민족이 천손(天孫)이라는 기록과 단군이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를 다 같이 배워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일제식민지 당시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한민족은 항상 일장기와 일제 왕에게 경례했으며 경건한 조례를 했다.    



기독교계의 일제를 향한 우상 숭배와 친일행적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937년 기독장로회의 기독교보에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렸다.“기독교인은 여력을 다해 일본 황실을 받들 것이며 황은(皇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며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총후(銃後)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라!”

*또, 1938년 4월 25일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각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신사참배와 총후 보국주간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기독교는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해 황도(皇道) 정신을 발휘하고 선양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44년 3월 3일 감리교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했다.

*유형기,윤치호,박희도,차재명 목사등이 1937년 각도 순회시국강 연에 나서서, 황국신민으로 부일협력 할 것을 주장했다.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목사는 1936년 1월29일 총독부 에서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6월에는 신사참배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YMCA 총무 신흥우 목사는 [동양지광] 1939년 2월호에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중략)...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조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 이라는 논설을 실었다. 신목사는 해방후에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왔다.


장로급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신사에 참배를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역대천황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 추태를 부렸습니다.

한국에서의 신사참배(神社參拜) 실시와 황민화정책.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했다(→ 개신교). 같은 달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된 윤치호(尹致昊) 등도 석방의 대가로 기독교를 통해 내선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조선감리교회의 일본감리교회로의 합동을 결의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친일에 앞장선 거물 목사 친일파 김길창

▲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우상 천조대신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는 목사들.     

1962년 6월, 71세의 김길창(金吉昌,1892∼1977 경남고성) 목사가 고희(古稀)를 넘어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전도사와 재혼하여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김 목사는 1933∼1934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이었으며, 1941년 이후 기독교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치로 활약한 인물이다.

일제패망후인 1949년 김길창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반민특위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 인물 ②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이 현저 ③ 신사참배에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케 함"이라는 범죄 사실에 덧붙여, "뿐만 아니라 기미년 3·1 운동에 언급하여 3·1 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며, 33인 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할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했으니 이는 위대한 선열에 대한 큰 모독일 것이다. 조국 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따라본 피고자의 죄적(罪跡)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기소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길창은 피의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문(조사관 심륜):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하여 33인을 모욕한 사실이 있는가?
답(피의자 김길창):기독교를 이용하여 33인 중 신앙을 떠나서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은 종교적 입장으로 보아서 오로지 기독교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33인을 모욕한 것은 아니올시다.

문:종교적 입장이든 무슨 입장이든 조국이 있어야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어야 종교가 있는데 종교적 입장만 주창하는 것이 민족의 본의로 생각하는가?
답: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조국이 광복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윤택해짐은 사실이오나, 독립운동을 방해나 또는 비방한 언사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말한 것이요, 33인 중 신앙을 떠난 사람 몇몇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의를 망각하고 기독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자체를 모독하였단 말이올시다.

문:우리 독립운동 열사들은 교회가 가장 안정한 장소라고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또는 행동을 시작하였고, 기타 열사들은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살인방화든 모든 역량을 다해서 오직 우리 조국 광복만 위하여 투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모독이 아닌가?
답: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일제패망후인 1949년 김길창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증인들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한다.

문(조사관 심륜):김길창의 성격을 잘 아는가?
답(증인 윤인구):말하자면 심히 날뛰고 출중하려고 애쓰고 독선적으로 활약하는 성질이고, 이런 인물은 탄압하고 회유하는 일경의 술책에는 응당 이용되었을 것이고, 공명심에 끌려 과한 언행이 있었겠습니다.

문(조사관 심륜):그 당시 증인의 직업은 여하.
답(증인 장세권):부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문:그러면 당시 김길창은 증인에게 친교하자는 동기가 없던가.
답:당시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1인자인 거물 목사로 경찰계에도 소위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며 교제가 심하였으니, 위세가 당당하여 본인같은 말직형사들에게는 조석간에 인사정도이고 접대도 소홀하였습니다.

문:그러면 친밀하던 경찰 간부는 누구였던가.
답:본인이 아는 자로서는 당시 고등계 주임 하라다(原田:왜인)와 부산서 고등계 주임 아라이(荒井:왜인)였는데, 하판락, 강락중이와도 친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문:교제가 심하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답:본인이 형사 근무시 어느 날 공무로서 김길창 본가를 찾아가니 김길창은 "지난 밤에도 하라다 고등계 주임이 왔었다" 하는 말을 직접 들은 사실도 있고, 더구나 김길창이 경찰에 출두할 시에도 형사들에게는 인사말도 없이 위세가 당당하게도 직접 아라이 주임을 찾으며, 아라이 주임 역시 김길창에 대한 태도는 마치 귀빈들이나 상관에게 대하는 환영을 하였고, 별석을 이용하야 오랫동안 요담한 사실도 빈번하였으며 대단히 친밀하였습니다.

문:김길창은 애국자 또는 신사참배 반대한 신자들을 밀고, 투옥케 하였다는데.
답:김길창은 경찰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니 말직형사인 본인으로서는 연락하고 밀담하던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하야 미지이오나 그 당시 국내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로서 목사 남녀 신도들 다수가 투옥당한 사실은 들었습니다.

문(특별검찰관 곽상훈):증인 김금순, 동(同) 한익동, 동 김만일, 동 윤인구, 동 박인순, 동 김상순, 동 권세권 등 피의자가 신사참배는 국민된 도리요, 국가의식인고로 적극 찬양한 사실과 신사참배 반대교인을 경찰에 밀고한 사실 및 조선민족성을 망각하고 황국화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공작한 사실, 친일적 언사 황민화운동 강연, 기미년 3·1 운동은 쓸데없는 장난이었다는 말의 행위를 입증하고 있는데 여하?
답(진술자 김길창):그런 증언은 모두가 거짓이올시다.


그러나 반민특위 공판 과정에서 김길창은 이런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고, 증인들도 후에 진술을 번복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를 밀고하였다는 부분은 입증되지 못한 채,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3개월 만인 1949년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말았지만, 그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선생은, "김길창이 위세 당당한 친일 거물 목사로서 1924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거창읍교회, 부산 영도교회 등에 전임하였다. 그러면서 교계 연합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것도 사실은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나의 영도교회 생활에 이렇다 할 큰 보람의 업적은 없어도 격리된 섬의식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하여 거의 날마나 청년사업 내지는 연합사업을 위해 뭍을 찾아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회고에서도 입증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어떻든 이런 (김길창의)역성(열성?)이 인정을 받았던지 연합공의회는 그에게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동경 유학생교회를 맡겼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잠깐 밀양읍교회를 맡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이 곳 군소재지가 나의 큰 꿈을 성취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하므로 큰도시로 진출할 기회만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김길창 회고록)”며, 1933∼34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되어 '진출'의 소원이 일단은 이루어진 셈“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러나 그 '진출'은 곧바로 '친일'로 연결된다. 즉,장로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는일제에 '순응'하는 길을 걷는다. 앞에서 인용한 반민특위의 기소의견서는"피의자 김길창은 목사로서 쇼와 16년(1941) 이래 일제패망까지, 안으로는 항서교회에서 신사참배 추진, 황민화운동, 민족정신 말살을 추진하고, 밖으로는 조선기독교와 일본전시기독교와의 지도이념 합치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일본 목사 가가와(賀川豊彦)와 도미타(富田滿) 등의 안내역이 되어 한국기독교인의 황민화운동의 추진단체의 수뇌 간부로서 활약하고, 소위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혹은 일본경찰과 결탁하여 탄압케 하였으니"라고 고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한익동 목사가 반민특위에서 "김길창은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있을 적에도 솔선적으로 신도들에게 추진 공작을 하고 보통인보다 배 이상의 활동을 하는 자이오니 주로 고등계 형사 주임들과 교제가 빈번하였으니 이면에서 공작은 여하하였는지 미지이오나 신사참배 반대한 목사와 남녀 신도들이 구금당하였으니 김길창의 밀고 소치의 행위인가도 능히 추찰됩니다. 본인은 어느 날 조용한 좌석에서 김길창에게 대하야 '일제에 너무 아부치 말고 경찰과 과도히 친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더니 답왈 '경찰을 배척하면 사업도 못하고 앞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어서 여차한 행위를 하노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한 것도 김길창의 일제 말기의 행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김길창은 그 후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학교를 불법으로 불하받아 현재의 부산 남성여중고를 설립하였으며,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는 한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종교계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계에도 발을 넓혀 자신의 탁월한 사업수완(?)을 발휘하였고 또한 능수능란하게 시류를 타면서 공명심을 채운 인물이었다.

일제패망 후, 감옥에서 살아남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신사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청하며 교회 쇄신운동을 시도했다. 이들은 ‘영적인 교회가 건전한 발전을 이루고 한국 교회가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공개적인 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죄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내분을 맞이했고 고신이라는 새로운 교단이 떨어져 나오는 등 진통과 분열을 겪었다.

그렇지만 개인이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일이 있었다. 1992년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당시 그의 고백은 친일 행적을 침묵으로 일관한 한국 교계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002년에는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가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 주일을 맞아 자신의 조부인 고(故) 조승제(1943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라는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했고 일제패망 후 한신대학교 이사장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던 인물) 목사의 친일 행적을 열거하며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를 고백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무엇이 두려운가, 일제잔재가 청산될때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공개해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빌붙어 일신일가의 영화와 금의옥식을 누린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의 명단을 2008년 4월에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군인 박정희,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교육 이병도(식민,반도사관 주범), 아동문학가 이원수, 무용가 최승희, 작곡가 조두남 등 모두 1,686명이 포함됐다. 이는 2005년 1차 3090명에 이어 두 번째이며, 지금까지 총 4,776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다음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분야별 대상자]에 대해서 먼저 경술국치를 낳게한 매국노 들과 일제왕과 토착미신(?)이라 일컫는 잡신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도 하고 일제에 적극협력한 친일종교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을사오적 [5명]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정미칠적 [7명]
고영희 송병준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

경술국적 [9명]
고영희 민병석 박제순 윤덕영 이병무 이완용 이재면 조민희


개신교 [58명]
갈홍기 강도원 고한규 곽진근 구연직 구자옥 김관식 김길창 김수철 김영섭 김우현 김응순 김응태 김인영 김종대 김진수 김형숙 김활란 남천우 박마리아 박연서 박현명 변홍규 송창근 신후식 신흥우 심명섭 양주삼 오문환 유각경 유일선 유재기 유형기 윤치소 윤치영 윤치호 윤하영 이동욱 이명직 이문주 이용설 임학수 장기형 장운경 장홍범 전필순 정상인 정순모 정인과 정춘수 조승제 채필근 최지화 최활란 한석원 홍병선 홍택기 황종률


가톨릭 [7명]
김명제 김윤근 남상철 노기남 신인식 오기선 장면


불교 [54명]
강대련 강성인 곽기종 곽법경 권상로 김경림 김경주 김동화 김법룡 김삼도 김영수 김영호 김용곡 김재홍 김정섭 김정해 김지순 김진월 김청암 김탄월 김태흡 김한송 박대륜 박도수 박병운 박영희 박원찬 박윤진 박찬범 변설호 손계조 신윤영 신태호 유재환 윤상범 이덕진 이동석 이명교 이보담 이석두 이종욱 이태준 이혼성 이회광 임석진 장도환 정병헌 정창윤 정충의 차상명 최취허 허영호 홍태욱 황벽응


천도교 [30명]
김동수 김명호 김명희 김병제 김종현 남증석 박석홍 박완 백중빈 손광화 손재기 신용구 오상준 이군오 이근섭 이단 이돈화 이우영 이인숙 이종린 이종식 임문호 전의찬 정광조 조기간 최단봉 최린 최안국 최준모 하상태



[민족적인 구심점(求心点)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가? 2편 일제잔재청산은 종교(기독교편)부터 개혁해야]

고순계 09/01/12 [14:46] 수정 삭제  
  이런 현상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조선 청년들이여 성전에 피땀을 바치자'는 어느 얼간이의 글을 대학 대자보에서 읽고는 저의 인생관은 바뀌었습니다.
교육이 없는 조직 나라는 망합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교육으로 국민을 인내천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길은 있습니다.
문제는 여건이 아니라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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